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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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해외 코인거래소 먹잇감 된 韓… 금융당국 “권한 없다” 뒷짐 [심층기획-韓, 해외 코인거래소 먹잇감 전락]

법망 피해 ‘큰 손’ 한국인 타깃

연예인 동원 전국 설명회로 수억 모아
해외 상장→시세조종→대량매도 사기
KOK코인 90만명 피해액 4조원 추산

2년간 해외로 간 韓 가상자산 72조원
특금법상 해외 업체 한국인 영업 금지
당국 단속·처벌 권한은 없어 규제 사각
美선 자국민 대상 불법영업 업체 퇴출

세계 10위권인 해외 가상자산거래소 엘뱅크의 한국 담당 직원 A씨는 국내에서 가상자산 발행사에 접근해 ‘뒷돈’(상장피)을 받은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의 수사 대상에 올랐다. 그는 국내 블록체인 발행사들과 벤처캐피털 등을 통해 발행사들에 접촉한 뒤 상장을 위한 투자금을 받는 식으로 사기를 벌인 혐의를 받는다.

 

한 발행사는 지난해 8월 A씨에게 25만달러를 입금했지만, 엘뱅크 상장은 이뤄지지 않았고 자금도 돌려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A씨가 다른 20여건의 상장에 관여하면서 뒷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A씨는 가상자산 발행업체들과 만나 “국내법을 피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것으로 전해졌다. 엘뱅크 측은 이 같은 사건이 알려지자 “개인의 일탈”이라며 선을 그었다.

 

◆‘큰손’ 한국 노리는 해외 거래소들

 

1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을 타깃으로 한 해외 가상자산거래소발(發) 사기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7월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시행에 따라 국내 가상자산거래소는 금융당국의 관리·감독을 받는 근거가 마련됐지만, 해외 거래소는 여전히 규제 밖에 있는 탓이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자국민 대상 가상자산 사업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미국과 달리 우리 금융당국은 해외 업체와 관련해서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그 여파로 국내 시장은 코인 투자 사기의 온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지난 1분기 원화로 이뤄진 가상자산 거래량이 미국 달러를 앞지르면서 한국인은 세계 시장에서 ‘큰손’으로 통한다. 이에 해외 거래소들은 한국 담당 직원을 고용하거나 국내 업체와 협약을 맺고 국내에서 버젓이 영업하고 있다.

 

국내 투자자를 대상으로 하는 코인 사기에는 해외 거래소가 연루돼 있다. 국내 발행사가 규제를 피해 해외 거래소에 코인을 상장할 수 있도록 도운 뒤 ‘신뢰할 수 있는 코인’이라고 속여 국내 투자자의 돈을 가로채고 있는 실정이다. 해외 거래소는 시세 조종 등을 해도 우리 금융당국의 감독이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노려 투자금을 모은 뒤 발행사의 물량을 대량 매도하는 ‘펌프 앤드 덤프’ 사기 등의 수법을 쓴다.

 

수억원대 투자 사기로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LF코인은 엘뱅크, 비트마트, 디지파이넥스 등 해외 거래소에 상장한 뒤 국내에서 투자자를 모집했다. 전국에서 설명회를 열고 코인 수익과 배당금 등을 주겠다며 투자자를 모아 놓고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피해자 김광연씨는 “매달 수익 200%씩 주겠다고 하고 해외 거래소에서 가격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주니 의심을 안 했다”며 “현재는 유통량이 없어 팔지도 못한다”고 털어놨다.

 

바이비트, 쿠코인, 게이트아이오 등 해외 거래소에 상장했던 KOK코인 역시 이 같은 방식으로 투자자를 모았고, 현재 사기 혐의로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경찰은 피해자 90만명, 피해 금액 4조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유명 전직 축구선수와 연예인 등을 고용해 투자자를 모은 골든골(GDG)코인도 해외 거래소 엠이엑스씨(MEXC)에 상장한 바 있다. 검찰은 관련 사기로 32억4600만원 규모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봤다. 이들 사기에 해외 거래소가 연루돼 있는데, 실제로 쿠코인이나 엠이엑스씨, 비티씨씨(BTCC) 등은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사실상 국내 투자자를 영업 대상으로 삼고 있다. 대행업체 등을 이용해 상장과 이벤트 등도 국내 가상자산거래소와 마찬가지로 진행한다. 해외 거래소들은 투자자 유치를 위해 국내 채용 사이트를 통해 한국인 마케터까지 모집해 왔다. 이날 국내 채용 사이트에 올라온 해외 거래소 직원 모집공고를 검색한 결과 20건 이상 찾을 수 있었다.

 

해외 거래소의 협업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는 업체 관계자는 “해외 거래소들은 거점 형식의 한국 매니저를 두고 정체 모를 코인을 발행하는 국내 업체들과 상장을 조율하고 있다”며 “국내에서 대규모로 이뤄지는 블록체인 행사 이면에는 이들이 접촉하는 네트워크 자리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거래도 가상자산으로만 오가는 탓에 탈세와 ‘자금세탁’ 문제도 따른다”고 덧붙였다.

 

◆금융당국 “감독 권한 없다”

 

가상자산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2022년 7월부터 지난 6월까지 2년간 국내 거래소에서 해외 거래소로 이동한 가상자산 규모는 553억달러(72조6000억원)에 달한다. 올해 6개월간만 해도 235억달러(30조8000억원)가 해외 거래소로 빠져나갔다.

 

해외 거래소로 향하는 자금이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금융당국은 해외 업체를 감독·관리할 권한이 없다는 입장이다.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은 금융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해외 거래소가 한국어 서비스를 하거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금융당국에 이를 단속하거나 처벌할 권한까지 부여하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금융감독원에 불공정 거래나 사기 신고가 들어와도 (사법기관의) 수사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미국 법무부는 지난해 가상자산거래소 바이낸스와 창업자 자오창펑에 적절한 자금세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혐의 등으로 43억달러 규모의 벌금을 내린 바 있다. 바이낸스는 미국에서 현지법인 형태로 운영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도 바이낸스를 상대로 미등록 영업 등을 둘러싼 소송도 벌이고 있다. 이에 따라 바이낸스는 미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바이낸스는 캐나다와 나이지리아 시장에서도 규제 리스크에 영업을 종료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우리도 관련법을 제정해 가상자산 사업의 범위와 합법·불법의 범위를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김민승 코빗 리서치센터장은 “특금법은 가상자산 사업자의 권리와 의무보다 자금세탁방지에 초점이 맞춰 있고, 이용자보호법은 이용자 보호 의무만 우선적으로 입법해 시행됐다”며 “아직 확립되지 않은 사업자 권리와 책임을 2단계 입법에서 명문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석진 동국대 교수(국제정보보호대학원)는 “금융당국이 2022년 8월 주요 해외 거래소들과 한국어 영업과 이벤트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조율을 했는데, 신설 거래소나 중소형 거래소는 지키지 않고 있다”며 “해외 거래소 모니터링이나 미신고 사이트 차단 등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