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포로부터/ 벤 스탠거/ 양병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만5000원
영국 생물학자 루이스 울퍼트는 “인생에서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출생, 결혼, 죽음이 아니라 낭배형성 단계”라고 말했다. 낭배형성은 수정란(접합체)의 분열 과정에서 미분화된 세포들이 한꺼번에 조직에 할당되는 시기다. 울퍼트의 말은 반쯤 우스갯소리지만, 그만큼 낭배형성은 배아 발생의 핵심 이정표다. 해리포터에서 기숙사를 배정하는 모자처럼 중요한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이를 거친 세포는 배아의 세 가지 배엽 중 하나에 속하고 각자 길을 가게 된다.
모든 생물은 세포 하나에서 시작된다. 수정란이 분열해 복잡한 생명체가 되는 과정은 이제 상식처럼 알려졌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여전히 경이롭기 그지없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인 발생생물학자 벤 스탠거는 “이렇게 복잡한 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가 어찌 이토록 단순한 것으로 압출될 수 있는 걸까, 이 독특한 단위에서 생성된 수조 개의 세포는 각각이 무엇이 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아는 걸까’라고 질문한다.
생명과학의 역사는 인류가 이 질문에 답을 찾아온 과정이다. 스탠거 교수의 신간 ‘하나의 세포로부터’는 세포를 발견한 때부터 지금까지 생명과학사를 추적한다. 인류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집념 어린 손작업을 반복하면서 유전정보와 발생, DNA 등 세포의 구조와 작동에 대해 이해를 넓혀온 시간을 흥미롭게 펼쳐 보인다.
생명의 발생 과정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두 시각이 대립했다. 하나는, 생명은 성체의 축소판 같은 ‘전배아’로 시작한다는 생각이다. 잉태 순간부터 모든 기관이 제자리에 있고 크기만 극히 작은 생명이 생겨난다는 것. 이에 맞서 발생이 점진적으로 이뤄진다는 후성론이 있다.
두 시각은 오랜 세월 엎치락뒤치락했다. 현미경으로 난자와 정자를 들여다보게 된 이후인 18세기에도 의외로 전성설이 강세였다. 생명이 처음부터 ‘성체의 축소판’이라면 창조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귀족 계급도 전성설로 조상의 권리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19세기 세포 이론과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나오면서 차츰 인식이 바뀌었다.
저자에 따르면 “발생의 여정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위험으로 가득 찬 항해”다. 세포는 분열할 때마다 수십억 개의 DNA 문자를 읽고 복사하고 해석하며, 동물이 성체가 될 때까지 그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다. 세포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분자 처리 과정은 정확도가 99.9%를 넘을 정도로 정밀하다. 그럼에도 수조개의 세포가 관여하니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오류에 자연은 가소성이라는 조절 과정을 통해 대처한다.
1891년 한스 드리슈의 실험은 세포의 가소성을 잘 보여준다. 그는 성게 수정란이 첫 번째 분열을 끝내자 세차게 흔들어 할구들이 흩어지게 했다. 반쪽 수정란에서 자란 기형 성게들이 시험접시를 잔뜩 채우리라 예상했지만, 다음날 접시에는 정상적인 성게 유생이 가득했다. 분리된 수정란들이 잠재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세포는 태어날 때부터 선택지가 제한적인 ‘전념성’과 변화에 열려 있고 경험에 따라 미래 경로가 결정되는 ‘가소성’의 두 특징을 가진다. 배아는 가소적 세포와 전념적 세포의 혼합물이다. 초기에는 가소성, 나중에는 전념성이 우세하게 된다.
유전자 하면 요즘은 바로 DNA를 떠올리지만, 한때 과학계에서는 유전자가 단백질로 구성됐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1940년대 오즈월드 에이버리의 폐렴구균 연구,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의 박테리오파지 연구 등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이론이 점차 받아들여졌다.
영국 생물학자 존 거든은 1950년대 후반 아프리카발톱개구리(제노푸스)의 알에서 핵을 제거하고 배아에서 추출한 핵을 이식해 올챙이와 개구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 연구는 동물복제 연구에 중요한 주춧돌을 놓았다. 당시 주류 시각에 도전하는 대담한 실험 결과이기도 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접합체가 분열할 때마다 각 세포들이 점점 유전자를 잃는다고 봤다. 분열할 때마다 유전자가 차츰 사라지고 세포의 목적에 맞는 것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든은 여러 단계의 배아에서 핵을 추출해 올챙이를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렇지 않음을 시사했다. 이후 1997년 복제양 돌리가 태어나면서 성체는 필요 없는 것들을 포함해 모든 유전자를 보유한다는 원리가 확립됐다.
책은 이외에도 유전자를 켜고 끄는 메신저리보핵산(mRNA)의 발견, 유전자와 각각의 변이를 연결 짓는 작업, 진화과정에서 동일한 유전자 세트가 재사용됐음을 알아내는 과정, 세포 사멸의 발견 등 생명과학의 발전 과정을 따라간다. 암, 줄기세포, 재생 등 여전히 도전과제가 많은 분야도 소개한다.
저자는 책을 닫으며 “후성유전학적 조절과 유전자 편집에 관한 발견은 실무자조차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사회 전반에 걸쳐 그 장단점을 따져볼 기회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함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러한(위험과 이점의 비교검토)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생물학적 문해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