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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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침묵과 다정하게 걸으며

일과 후 천변을 걸으며 하루 마감
스치듯 만나는 사람들의 일상들
주위의 의미없는 소음은 잊은채
잊고 있던 세상의 소중함과 조우

일과를 마치고 천변을 걷는 것은 하루를 정리하기에 참 좋다. 연희동에 살 때는 홍제천변을 걸었는데, 월계동으로 이사 온 후로는 중랑천변을 걷는다. 나의 서울 삶은 대체로 천변을 걷는 것으로 일과가 마무리된다. 황화 코스모스가 중랑천변에 줄지어 피었다. 그렇게 후텁지근하던 날씨가 고맙게도 서늘한 서풍을 몰고 온다. 여름내 천변에서는 생수를 나누어주었다. 노원구에서 구민들에게 생수를 무료로 공급하는 ‘힐링 냉장고’를 운영한 것이다. 이사 온 후 곧바로 노원구의 식구로 환대받는 느낌이라 냉수 한 병이 참으로 고맙던 한 철이었다.

중랑천 둔치 곳곳에서는 생활체육교실이 열리고 있다. 신나는 댄스곡이 흘러나오고 단상 위에는 에어로빅 강사가 큰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다. 연령대의 구분 없이 종횡을 이루고 열심히 따라 한다. 꽤 오래 연마한 듯 동작이 정연하다. 남학생들은 농구 골대 앞을 훌쩍 뛰어오르며 볼을 던지고 있고, 여학생들은 배드민턴을 치면서 연신 깔깔 웃고 있다.

천수호 시인

갓 핀 갈대꽃을 지나고, 환삼덩굴 위에 흩뿌려진 노란 새삼을 지나고, 강아지만 한 수크령 무더기를 지나고, 시원한 강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천변을 달린다. 왜가리 한 마리가 목을 쭈욱 빼고 물고기 사냥을 할 동안에도 물은 계속 잘박거리며 흐르고 있다. 축구공 하나가 급물살을 타고 둥둥 떠내려가고, 건너편 아파트 불빛은 물결에 잔뜩 우그러져서 칸칸이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뭉개고 있다.

전동 휠체어 한 대가 곁을 스쳐 지나간다.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린다. 휠체어 뒤편 난간에 아내로 보이는 여성이 올라타 있다. 좀 천천히 달리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청년 연인 한 쌍이 발맞춰 조깅한다. 셔츠 뒷등이 흠뻑 젖어있다.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초등학생 아들이 앞서 달려가고 그 뒤를 아버지가 호위하듯이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모두 보호하고 배려하는 모습들이다. 하루가 참 싱싱하고 무사했노라는 인사다.

천변에서는 또 폐경춘선 철로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다. 폐철로 또한 구민 휴식처다. 아파트가 언뜻 보이긴 해도 숲이 많아 여유롭다. 무엇보다 이 길에서는 키 큰 미루나무숲의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촘촘한 소나무 숲도 있어서 지친 몸을 숨어들 수 있게도 한다. 이곳을 걷는 사람에게는 ‘가지 않는 길’이 따로 없는 것이다. 유쾌한 날에는 철로 위를 종종 걷고, 사색이 깊은 날에는 소나무 숲길을, 또 뭔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확 틘 미루나무 길을 걸을 수 있다.

천변의 여유로움 너머로 아직 귀갓길의 정체된 차량 행렬이 보인다. 차 소리가 좀 뜸한 곳으로 오면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가 올해만큼 반가운 적이 있었던가. 뜀박질을 멈추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인다. 컴컴한 풀 속에는 또 저들만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풀벌레들은 다 함께 노래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혼자 걷는 것을 즐긴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말을 낭비해 온 피로감 때문일까. 우리가 종일 한 말이 천변 밖의 소음처럼 의미 없는 잡음은 아니었을까.

“소년이 제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귀뚜라미들의 왕이 그걸 갖고 있었다)/물방울 속에서/소년은 제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말하려고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나는 그걸로 반지를 만들 거예요/그래서 그가 자기 작은 손가락에/내 침묵을 끼도록 하려고요.“(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 ‘벙어리 소년’ 부분) 벙어리 소년은 물방울 속에서 제 목소리를 찾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말하려고 목소리를 찾는 게 아니란다. 벙어리 소년이 사람의 목소리를 원하지 않는다니…. 내 침묵을 끼도록 하려 한다니…. 조금 전에 들은 귀뚜라미 소리가 소년이 찾던 그 소리라고 생각하니 나의 언어가 새삼 무용해진다. 천변은 그런 곳이다. 내일의 제 목소리를 찾기 위해 오늘의 목을 쉬게 하는 침묵의 물방울을 공급받는 곳이다. 걷는 사람들 머리 위로 작은 물방울을 하나씩 덧씌워 본다. 일과를 잊고 침묵과 다정하게 걷고 있는 그들의 고요함이 참 아름답다.

 

천수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