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군사관학교 홈페이지에는 자랑스러운 동문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1순위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해사에 입학한 카터는 전쟁 기간 생도 신분이어서 실전 경험을 쌓진 못했다. 소위 임관 후에는 잠수함 장교로 일했다. 당시 막 개발된 핵추진 잠수함에서 근무할 요원으로 뽑힐 만큼 능력을 인정 받았지만 1953년 대위로 현역 복무를 마쳤다. 그해 타계한 부친의 가업인 조지아주(州) 땅콩 농장 운영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카터가 해사 졸업생 중 유일한 대통령인 만큼 카터에 대한 미 해군의 애정은 대단하다.
카터는 1963년 민주당 공천을 받아 조지아 주의회 상원의원이 되는 것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71년에는 조지아 주지사에 올랐다. 그때까지도 수도 워싱턴의 중앙 정치 무대에서 보기에 카터는 ‘무명 인사’나 다름없었다. 1972년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은 카터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권력형 비리에 연루돼 물러나며 미국인들은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인의 출현을 갈망하게 되었다. 땅콩 농사를 짓다가 정계에 뛰어든 카터는 그런 바람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1976년 대선에서 카터가 공화당 후보이자 현직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를 누르고 당선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1981년 1월20일까지 이어진 카터의 대통령 임기는 한국 현대사의 암흑기와 정확히 겹친다. 박정희 대통령과 사이가 나빴던 그는 1970년대 말 주한미군 완전 철수 카드를 꺼내 한국 정부를 당황케 했다. 비록 철수는 없던 일이 되었으나 동맹국 미국을 향한 불신이 커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카터 행정부는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그에 따른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이듬해인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오늘날 그가 한국인들의 비판을 받는 이유다.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한참 지난 1994년 여름 카터는 다시 한반도 이슈의 중심에 섰다.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북한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 간에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위기가 고조되자 중재자를 자처하고 평양을 방문해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 직후 북한 주석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회담은 없던 일이 되었고 카터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1924년 10월1일 태어난 카터가 지난 1일 100세 생일을 맞았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인사들 가운데 최고령 기록에 해당한다. 한 해 전인 2023년 2월 암 투병 중이던 카터는 연명치료를 중단함과 동시에 호스피스 돌봄에 들어갔다. 누구나 그의 임종이 임박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18개월이 지나도록 카터는 멀쩡히 살아 있다. 그 사이 3살 어린 부인 로절린 카터 여사가 치매에 걸렸다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일각에선 카터가 오는 11월5일 미 대선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그가 무사히 100세를 넘기면서 전 세계 수많은 환자와 노인들에게 희망을 선물한 것이야말로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이상의 업적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