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에 담긴 커피에서 과일 맛이 나는지가 꽤 오랫동안 커피 생두의 품질을 가늠하는 지표 중 하나로 통용됐다. 커피에 들어 있는 다양한 유기산에서 비롯되는 신맛이 농익은 과일을 떠올리게 하는 단맛과 어우러져 마시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과일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에 따라 커피 품평회에서 심사관들이 애용하는 용어가 다양한 과일의 명칭이다. “잘 익은 복숭아 맛이 나고 참외와 같은 부드러움이 느껴진다”는 식으로 커피의 우수한 면모를 특정 과일에 비유한다.
그러나 더 이상 커피에서 과일 맛이 난다고 해서 생두 자체의 품질이 우수하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됐다. 커피 열매에서 씨를 가려내 말리는 일련의 가공 과정에 과일을 집어넣거나 과일 향이 나는 화학물질을 뿌리는 방식이 합법적(?)으로 유행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상황은 1980년대 국내에서 유행했던 ‘헤이즐넛 커피’를 떠올리게 한다. 커피를 볶은 지 오래되면 향이 날아가고 날카로운 신맛이 두드러져 마시기 힘든 지경이 된다. 일부 카페 업주들이 이를 버리기 아까워하며 헤이즐넛 향기 물질을 분무해 원두에 살짝 입힌 뒤 팔았다. 197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방식인데. 소비자들 사이에 향이 좋은 커피로 손을 타면서 공장 생산으로 이어져 한국에 수출된 터였다.
시간이 흘러 국내 커피소비자들이 지식을 쌓으면서 “헤이즐넛 커피는 인공적으로 향을 입히는 가향커피(Flavored coffee)로서 상대적으로 생두 품질이 떨어지는 커피를 사용해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00년대 들어서 스페셜티 커피가 유행하면서, 커피애호가들은 가향커피 마시는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가 됐다. 원두커피를 아무 첨가물 없이 블랙커피로 마시는 것이 ‘격조 있는 커피 음용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블랙커피임에도 과일 향이 풍성하게 발현되면 좋은 커피라고 생각하고 다소 비싼 값을 치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데 인퓨즈드 커피(Infused coffee), 코퍼멘티드 커피(Co-fermented coffee)가 확산돼, 이제는 더 이상 좋은 커피를 가늠하는 지표로 과일 맛을 활용할 수 없게 됐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이 2024년 대회부터 선수들이 이들 커피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개정하면서 족쇄가 풀렸다.
게이샤 커피로 유명한 파나마는 ‘커피의 정체성 보호’를 이유로 들며 인퓨즈드 커피와 코퍼멘티드 커피를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금지했지만, 계속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커피에 인위적으로 과일 맛을 덧입히는 기법이 양성화하면서 장르도 구체화하고 있다.
인퓨즈드 커피는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과일, 꽃 또는 향신료와 같은 다른 재료를 커피에 직접 첨가하는 방식이다. 로스팅한 커피 원두에도 특정 물질을 집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는 ‘가향커피’로 분류된다. 따라서 향을 입히는 이들 공정은 대체로 로스팅되기 전 생두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코퍼멘티드 커피는 열매나 점액질이 묻은 파치먼트 상태에서 특정 과일을 집어넣고 함께 발효하는 과정을 통해 향을 씨앗에 주입하는 효과를 노린다.
분명한 것은 이들 커피의 맛으로는 커피 자체가 타고난 향미의 잠재력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와인문화에서는 자연의 축복을 그대로 담아낸 ‘테루아 와인’이 존중받는다. 하지만 커피문화는 이대로 간다면 ‘테루아 커피’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과일을 버무려 좋은 커피인 양 치장한 커피가 과연 행복할까?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