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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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겨진 브래지어, 부서진 두개골…8개월뒤 발견된 '인기' 보험설계사

"실종 수사 골치" 신고 접수 꺼린 경찰…전화 발신자 조사도 미적[사건속 오늘]
피해자 상태 정확히 말한 용의자는 알리바이 입증 못했지만 수사 안해…미제로

"여보세요? 여보세요. 엄마, 어디야 어? '뚜뚜뚜뚜' 엄마, 엄마~"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던 엄마를 기다리던 딸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 그리고 10여 초간 흐르던 정적. 대체 누구였을까?

 

훗날 끝내 돌아오지 않은 엄마를 떠올리며 성인이 된 딸은 이렇게 말했다. "그 나이에도 직감이 들었어요.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엄마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쩌면 범인일 수도 있었겠죠"

 

사진=뉴시스

8개월 뒤 시신 발견…유품 중 휴대전화만 없어져, 반쯤 벗겨져 있던 브래지어

 

1999년 10월 9일 저녁 7시. 경남 진주시에서 보험설계사 일을 하던 박정자(39) 씨는 전화 한 통을 받고 TV를 시청 중인 딸(11)에게 문단속을 당부한 뒤 집을 나섰다. 그것이 서로의 마지막이 될 줄은 이때까지 두사람 모두 알지 못했다.

 

사건 당일 엄마가 돌아오겠다는 시간이 한참을 지나자, 걱정된 초등학생 딸은 밤 10시가 다 돼서 전화를 걸었지만, 엄마는 받지 않았다.

 

이튿날 가족들은 박 씨에 대한 실종 신고를 했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그로부터 8개월 뒤. 2000년 6월 실종자의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의령에서 박 씨의 백골이 발견된다.

 

당시 인근 지역 주민이 길을 잃은 치매 환자인 노모를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시체 썩는 냄새를 맡고 신고해서 발견된 백골은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이는 백골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던 부분이었다.

 

박 씨라는 신원이 빨리 밝혀지게 된 이유는 유품 중 주민등록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유품 중에서 오직 휴대전화만 없어진 상태였으며 금팔찌와 현금 등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특히 사체에 있던 옷가지 중 상반신의 브래지어가 반쯤 벗겨진 채 위로 올라가 있었다.

 

부검 결과 박 씨의 두개골에서는 작은 망치 같은 둔기로 타격당한 흔적이 있었다.

 

"실종 수사는 골치 아파" 신고 접수도 꺼린 경찰의 '귀차니즘'

 

박 씨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 해당 사건을 단순 가출로 분류한 경찰의 수사가 못마땅했던 박 씨의 친정 쪽에선 사고에 의한 실종 가능성을 열어놓고 조사해 달라면서 실종신고를 다시 냈지만, 경찰 측에서는 "실종 신고하면 골치가 아파진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대며 이를 꺼렸다.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박 씨의 남편과 달리 박 씨의 친정에서는 경남 지방청과 진주경찰서에 진정서를 보내는 등 수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경찰에게 실종 수사를 접수해달라고 또다시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은 "외도로 인한 단순 가출일 것"이라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고, 박 씨의 친정은 "남편이 혹여나 좀 못나고 떨어진다고 해도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라 쉽게 갈 사람이 절대 아니다"라고 수사 방향에 대한 의문을 지속해서 제기하며 납치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거론했다.

 

경찰의 미온적인 태도 직접 수소문 나선 박 씨의 남동생

 

경찰의 수사 진행 과정에 답답함을 느낀 박 씨의 남동생은 직접 누나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을 시작했다.

 

이때 박 씨의 남동생은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박 씨가 보험을 판매하기 위해 화물차 운전기사들을 종종 만나곤 했는데 "주변 운전기사 중 한 명이 박 씨를 좀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중 누군가가 집에 못 가게 감금해 둘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하는 말을 주변인을 통해 듣게 된다.

 

실제로 박 씨는 큰 키에 호감형 외모를 가졌으며,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주변인들에게 언제나 인기 있고 환영받던 인물이었다.

 

또 박 씨의 남동생은 보험사무소 인근 마을에서 한 운전기사가 박 씨를 어떻게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던 상태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 남편, 계획범죄 가능성 작아 용의선상서 제외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경찰도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박 씨의 시신이 발견됐고, 경찰은 피해자의 신발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봐서, 범행은 실내에서 이루어진 뒤 시신이 유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으며, 밤늦게 외진 장소에서 이루어진 점으로 봤을 때 주변의 지리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박 씨의 남편은 자택 인근의 화물 기사 센터에서 기사들에게 보험을 알선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고, 박 씨는 이들에게 보험설계를 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원래 미혼모였던 박 씨와 박 씨의 남편 A 씨는 재혼한 사이였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A 씨는 소득이 거의 없는 한량이었고, 보험설계사로 그럭저럭 소득이 있는 아내와 사소한 일로 자주 마찰이 있었다.

 

특히 A 씨가 아내 박 씨 앞으로 사망보험을 넣은 사실이 밝혀졌으며, A 씨가 박 씨 사망 후 딸을 데리고 보험회사로 찾아가 보험금을 타가는 등 의심 가는 행동으로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실종됐던 박 씨의 사체와 함께 발견된 신분증 등 유류품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보험금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작아 유력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경찰의 수사 두 번째 용의자 B 씨, 사건 발생 시각 알리바이 입증

 

발신자 추적 서비스 이전 시대였던 1999년도에는 휴대전화 통화 추적을 위해서는 경찰이 수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에 대한 수사는 전혀 진행하지 않았고, 탐문수사에만 의지해서 당시 전화를 했던 사람이 화물차 기사 B 씨라는 것을 확인했다.

 

박 씨의 보험 고객 중 한 명이었던 B 씨는 보험증권을 받지 못해 박씨의 남편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증권을 갖다 달라 통화를 했고, 사건 당일 저녁 박 씨가 보험증권을 건네준 뒤 자신의 사무실에서 나갔다고 진술했다.

 

이후 B 씨는 친구를 만나러 나간 뒤 3시간 뒤인 10시쯤 박 씨의 남편인 A 씨의 사무실로 와서 함께 대화를 나눈 뒤 잠을 청했다는 알리바이가 입증됐다.

 

또 B 씨는 박 씨 남편의 부탁을 받아 보험에 가입했을 뿐 박 씨와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고 진술했고, 더 이상의 혐의점이 없다고 본 경찰은 B 씨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했다.

 

경찰 수사 전혀 받지 않았던 또 다른 용의자 C 씨, 대체 왜?

 

경찰은 B 씨를 만난 직후 박 씨가 만났을 만한 인물들을 조사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당시 경찰은 박 씨가 B 씨와 7시 30분쯤 헤어진 뒤 이동한 곳에서 범행을 당했으며 그 시간대는 8시 이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박 씨가 B 씨와 헤어진 직후 만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당시 경찰은 박 씨에게 전화를 건 또 다른 인물이 누구였는지 전혀 확인하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수사를 시작한 시기엔 이미 통신사에 남은 기록이 모두 삭제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을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의심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박 씨와 평소 살갑게 지내던 화물차 기사 C 씨였다.

 

함께 술을 마시는 건 물론 박 씨를 좋아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던 C 씨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돼 어떠한 수사도 받지 않았고, 그렇게 경찰은 수사를 종결지어 버렸다.

 

사건 발생 17년 뒤 만난 C 씨 "시신에 목걸이 팔찌 다 있었다는구먼" 또렷이 기억

 

사건 발생 17년이 지난 뒤인 2016년. C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 씨가 실종되던 날 자신은 동료 기사의 부탁으로 대신 트럭을 몰고 다른 지역에 갔다며 대수롭지 않게 당시에 대해 떠올렸다.

 

하지만 C 씨가 언급한 동료 기사는 대리운전 자체를 남에게 부탁하는 일이 거의 없다며 이를 부인했고, 자신은 그 당시 직접 차를 몰고 서울에 있었다고 밝혀 C 씨의 증언과 명백히 엇갈렸다.

 

또 인터뷰 당시 C 씨는 시종일관 박 씨에 대해 '정자는, 정자가'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등 친근한 모습을 보였지만, 정작 당시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사실도 확인됐다.

 

계속해서 두사람 사이가 어땠냐는 질문엔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라고 대답하다가도 "술도 먹고 밥도 먹고 하는 사이였다"라고 말을 바꾸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시신에 목걸이 지갑 팔찌 다 있다고 하는구먼, 휴대전화는 싸우다가 날아간 거겠지"라며 17년이 지난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너무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C 씨에 대해 혐의를 강화하는 또 다른 사실로서 차량 문제로 시비가 있던 어떤 운전자를 망치로 뒤통수를 치고 달아난 전과가 있다는 점도 확인됐다. 박 씨가 살해당한 도구 역시 망치로 추정됐다.

 

결국 C 씨는 박 씨의 실종 당일 알리바이도 입증되지 않았으며,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수사 종결 25년, 원론적인 공소시효는 이미 끝

 

현재 박정자 씨에 대한 사건은 이미 종결된 지 25년이 넘었기 때문에 원론적으로는 공소시효가 끝났다. 하지만 성폭력 범죄로 인한 살인사건은 공소시효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수사 재개 및 범인 기소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당시 백골 사진을 분석한 법의학자에 따르면 옷이 위로 돌돌 말려 올라가 있었던 건 동물이 개입된 움직임으로서는 가능성이 작으며 브래지어가 상의 쪽으로 올라가 있는 상태를 감안하면 성폭행 후 살해됐을 가능성이 꽤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