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의 여파로 2072년에는 국내 65세 이상의 고령인구 비율이 47.7%에 육박할 전망이다. 48년 후면 전체 인구의 절반이 고령인 셈이다. 내년에는 전체 인구의 20%가 만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되는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다. 고령화 사회(2000년)에 들어선 지 25년 만인데 일본보다 37년 더 빠르다.
고령화 시계가 빨라지는 만큼 건강한 나이 듦을 뜻하는 ‘웰에이징(Well-aging)’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노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직접 팔을 걷은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바로 경북 칠곡군이다. 군은 ‘노화’, ‘고독’, ‘질병’ 등 노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해 직접 고령화 시대에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심에 ‘노인 래퍼들’이 있다. 이들은 국내를 넘어 해외 주요 언론에도 소개되며 ‘K할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노인의 건강과 복지를 보살피는 건 물론 이들이 행복한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군의 노력은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랩은 젊은이 전유물?… 할미넴이 떴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가까워질수록 인생은 우울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즐겁게 랩을 하며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칠곡할매래퍼 그룹 ‘수니와칠공주’의 리더 박점순(86)씨는 10일 건강한 노년의 비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박씨는 행복감을 10점 만점으로 친다면 요즘 최고점인 10점이라고 했다. 수니와칠공주는 지난해 8월 칠곡군 지천면에 사는 할머니들이 모여 결성한 평균연령 85세의 8인조 그룹이다.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뒤늦게 한글을 깨치고 랩에 도전했다.
할머니들은 직접 쓴 시 7편을 랩으로 바꾼 자작곡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대표곡으로는 가난과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픔을 노래한 ‘환장하지’와 늦깎이 학생으로 한글을 배우는 기쁨과 과정을 소개하는 ‘나는 지금 학생이야’ 등이 있다. 6·25전쟁 당시 총소리를 폭죽 소리로 오해했다는 ‘딱꽁 딱꽁’과 북한군을 만난 느낌을 표현한 ‘빨갱이’ 등 전쟁의 아픔을 노래한 곡도 있다.
평범한 할머니들은 랩을 하면서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다. 해외 유력 매체인 로이터와 AP, 중국중앙(CC)TV, 일본 NHK 등도 할머니를 취재했다. 주한폴란드대사관은 할머니들을 고령화 시대의 새로운 해법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대기업 광고에 출연하는 등 누구보다 바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칠곡 할매래퍼 전성시대… 그룹만 6개
이 영향을 받아 군에는 할매래퍼 그룹이 6개나 결성됐다. ‘텃밭왕언니’와 ‘보람할매연극단’, ‘우리는 청춘이다’ 등이다. 이 가운데 텃밭왕언니는 수니와칠공주가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을 무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랩을 배우기 시작했다. 텃밭왕언니의 성추자씨는 “랩 공연을 보았을 때는 우리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랩을 해보니 힘들었다”면서 “선배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후배그룹이 될 수 있겠다”며 각오를 밝혔다.
군은 도시재생뉴딜사업으로 지난해 11월 국내 최초로 할매힙합 그룹 배틀 대회를 개최하고 전문 래퍼를 섭외해 랩을 배울 수 있게 지원했다. 취약계층 노인의 무료 급식소인 ‘칠곡사랑의 집’은 전국 최초로 랩 프로그램을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칠곡사랑의집은 전국의 여느 무료 급식소와는 풍경이 사뭇 다르다. 본격적인 배식 전 노인들이 모두 자리에 앉으면 5분 정도 랩배틀이 이어진다. 노인들은 “헤이요”를 외치며 즐겁게 손뼉을 치고 랩을 한 뒤 식사를 한다.
대한노인회도 군의 프로그램에 큰 관심을 보였다. 노인회는 군과 지난 1월 ‘K할매 콘텐츠 확산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노인회는 할머니들의 활동 현황과 성과를 전국 지회에 전파하고 공동으로 노년층 맞춤형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김호일 대인노인회장은 “K할매 콘텐츠가 전국적으로 알려져 노년층이 인생 2막을 주체적이고 풍요롭게 잘 가꾸어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칠곡할매글꼴 주인공들 대통령 만나
한글과컴퓨터의 한컴오피스에는 눈에 띄는 글꼴이 있다. ‘칠곡할매글꼴’이다. 군은 2020년 6월 성인문해교실 400여명의 수강생 중 개성 있는 글씨체를 보인 5명을 선발했다. 5명의 할머니는 네달여 동안 1인당 A4용지 2000장 이상을 연습해 필체를 정립했다.
군은 이렇게 나온 1만여장을 모아 글꼴 제작 업체에 의뢰했고 지난해 12월 칠곡할매글꼴을 선보였다. 글꼴은 글씨체 원작자의 이름을 딴 ‘칠곡할매 권안자체’와 ‘칠곡할매 이원순체’, ‘칠곡할매 추유을체’, ‘칠곡할매 김영분체’, ‘칠곡할매 이종희체’이다. 한컴오피스는 물론 MS워드와 파워포인트 등에 정식 글씨체로 등록했고, 국립한글박물관은 이를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신년 연하장에서 칠곡할매글꼴 중 하나인 권안자체를 사용했다. 취임 후 첫 새해를 맞아 각계 원로와 주요 인사·국가유공자 등에게 발송한 연하장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월에는 평생학습의 중요성을 알리고 감사를 전하기 위해 할머니들을 대통령실로 초청하기도 했다.
최경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언론광고학) 교수는 “다양한 글씨체가 많은 사회일수록 이를 활용한 글꼴과 문화가 다채롭게 발달하고 관련 산업이 성장한다”면서 “아날로그 감성과 고향의 정이 녹아 있는 칠곡할매글꼴은 새로운 영감과 아이디어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욱 칠곡군수 “할매래퍼·글꼴 관광자원화… K할매 문화 선도해 나갈 것”
“고령인구 1000만 시대는 눈앞에 주어진 현실입니다. 기회로 바라보는 역발상이 필요한 시점이죠.”
김재욱 경북 칠곡군수는 10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에서 배움을 향한 노인의 열정과 도전을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응원하고 있다”면서 할매래퍼와 할매글꼴 등을 내세워 노인 문화를 선도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김 군수는 “인구 구조는 급격하게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노인은 문화 소외 계층으로 꼽히고 있다”면서 “노년을 떠올리면 대부분 따분하게 시간을 때운다는 생각이 들 텐데 군의 노인은 배움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보다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특히 칠곡 할머니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며 거침없는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면서 “군은 노년층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며 문화의 수혜자에서 공급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군은 실버세대의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칠곡할매문화관’과 ‘할매시화거리’ 조성에 열을 쏟고 있다. 이 중 할매문화관은 김 군수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칠곡할매글꼴로 대표되는 군의 평생학습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김 군수는 이런 아이디어를 직접 행동으로 옮겼다. 칠곡 할머니들과 함께 대통령실을 방문했고, 윤 대통령으로부터 할매문화관 건립에 필요한 국비 200억원 지원에 대한 긍정적 답변을 받아놓은 상태다. 할매문화관은 왜관읍에 연면적 2640㎡에 지상 3층 규모로 조성한다. 교육장은 물론 전시실, 공연장, 휴게공간 등을 갖춰 ‘노인의 공부방이자 사랑방’으로 쓴다는 계획을 세웠다.
‘칠곡할매글꼴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는 물음에 김 군수는 “정규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가 남긴 문화유산으로 한글이 걸어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새 역사를 쓴 것”이라며 “글꼴을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 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김 군수는 “앞으로도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노인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고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K할매 문화를 선도해 나갈 계획”이라며 “군이 열어간 K할매 문화가 전국적으로 알려져 노년층이 인생 2막을 주체적이고 풍요롭게 가꾸어 가는 좋은 선례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