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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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우리] 북핵, 이대로 용인될 것인가

국제사회 일각 북핵 현실 인정
군축 협상 주장 인식 변화 우려
확고한 비핵화 원칙 대응 고수
북 협상 나오게 노력 계속해야

최근 들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 일각의 인식 변화가 우려스럽다. 지난 9월27일 유엔 총회에 참석 중이던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국제사회는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란 점을 인정하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로시 사무총장의 이러한 발언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핵무기 확산을 막기 위한 핵 기술의 통제를 책임지는 국제기구의 수장이 ‘북핵 보유’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사실 북핵을 기정사실로 하는 발언은 종종 접해 왔다. 수년 전부터 해외의 일부 전문가들은 북핵을 현실로 인정하고 비핵화 협상 대신 군비축소 협상을 주장해왔다. 2017년 9월 서울에서 열린 국방부 주최 안보대화에서 러시아의 한 중진 학자는 북한이 핵 포기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으므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 포기 요구를 즉각 중단하고 미·북 간 검증 가능한 군축 대화를 시작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 상당수의 전직 미국 관리와 전문가도 북한이 이미 상당수의 핵탄두와 핵물질을 확보하고 있어 북한에 대해 비핵화 노력보다는 핵 동결 또는 핵 군축 협상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장덕준 국민대 명예교수·유라시아학

트럼프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허버트 맥매스터는 그러한 미·북 군축 협상이 실현될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지난 7월 미국 허드슨연구소가 주최한 온라인 대담에서 그는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모라토리엄(유예)과 핵 군축의 빅딜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재집권 시 미국은 북한이 미국에 도달하는 ICBM 개발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고 미·북 간에 비핵화 대신 핵 군축 회담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세계 최대 핵보유국 러시아의 지도부가 직접 북한 핵을 기정사실로 하는 발언을 이어감으로써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3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자체적인 핵우산’을 보유했고 러시아에 핵과 관련해 어떤 도움도 요청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발언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푸틴 대통령과 유사한 발언을 했다. 지난 9월27일 러시아 외무부 웹사이트를 통해 기자들과 가진 문답에서 라브로프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제공하는 핵우산에 대해 러시아는 북한과 함께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북한에 적용되는 ‘비핵화’라는 용어는 의미가 없어졌으며 우리에게 그것은 종결된 문제”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1990년대 1차 북핵 위기 이래 줄곧 ‘한반도 비핵화’를 원칙으로 내세우면서 6자회담 등 다자협력을 통한 정치적 해결을 주장해왔다. 그러한 기조는 푸틴 대통령이 2013년 11월 한국 방문을 앞두고 가진 KBS와의 인터뷰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이후 북·러 밀착이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러시아는 대북 제재를 완화하는 한편으로 북한의 핵 개발도 사실상 용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북한 핵 문제의 인식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러시아 외무장관의 북핵 발언에 대해 대한민국 외교부 당국자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지적한 것은 적절한 조처였다. 우리는 최근 국제사회 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북한 핵 개발 용인 움직임에 대해 확고한 비핵화 원칙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 바탕에서 한국은 미국과 함께 ‘핵협의그룹(NCG)’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는 등 한·미동맹을 공고히 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일본,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와 공조해 핵 군축이 아닌 비핵화를 목표로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장덕준 국민대 명예교수·유라시아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