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9일은 578주년 한글날이었다. 한글날은 세종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3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반포한 날이었다.
1443년 12월30일 실록에는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 서문에는 “정통 11년(1446년) 9월 상한(上澣: 10일)”에 정인지가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의거하여 해방 후 음력 9월10일인 양력 10월9일을 한글날로 확정한 것이다.
한글은 창제 동기가 밝혀져 있는 문자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세종은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을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내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쉽게 써서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는 자주, 애민, 실용 정신이 한글 창제의 주요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1444년(세종 26년) 2월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중심이 되어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국을 섬기고 중화(中華)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움이 크다는 것, 설총이 만든 이두가 있으므로 한글을 창제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 한글은 하나의 기예(技藝)라는 것 등을 주요한 이유로 내세웠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처럼 지금의 한글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글자라는 것, 옥사(獄事)에 임하여 한글을 쓰면 어리석은 백성도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 삼강행실(三綱行實)을 한글로 번역하여 민간에 배포하면 충신, 효자, 열녀가 많이 나올 것 등을 강조하였다. 세종은 최만리의 반대에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1446년 공식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어려운 한자 대신에 쉬운 한글 시대를 맞이하는 전기를 맞이하였다. 양반 사대부들은 여전히 한자를 선호하였지만, 한자의 벽을 넘기 어려운 백성이나 부녀자에게 한글은 가뭄 끝 단비 같은 역할을 했다.
세종은 미래를 예견한 느낌을 주는 왕이다. 요즈음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 한글처럼 문자를 보내기 쉬운 글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한자 서적들에 한글을 붙인 ‘언해본’을 편찬하였다. 조선왕조 개국의 정당성과 왕실을 찬양한 ‘용비어천가’와 같이 한글 노래를 만들어 더욱 쉽게 내용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왕이 내리는 지침에서 시작하여, 죄수들에게 내리는 판결문에도 한자와 새 글자인 한글을 함께 썼다. 관리의 시험 과목에도 한글을 두어, 그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한가위, 가람과 뫼(강과 산), 나들목, 시나브로(조금씩 조금씩), 가온(가운데), 가랑비, 노고지리(종달새) 등 예쁜 한글은 너무나 많다. 세종이 애민 정신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한 뜻을 기억하면서 우리 말과 글을 쓰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나갔으면 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