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뜻밖의 낭보는 24년 전 겨울 노르웨이 오슬로 거리를 떠올리게 했다. 2000년 12월10일 오슬로 시청에서는 김대중(DJ)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열렸다. 현지 취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오슬로 시민과 교민 수백명이 횃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인 장면이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김 대통령 부부가 머물던 그랜드호텔 앞이었고, 관례에 따라 김 대통령은 호텔 2층 발코니에 나와 환영 인파에 손을 흔들었다. 그때 누군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먼 이국의 거리에서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끝나는 애국가를 듣자니 가슴이 뭉클했다.
지난 10일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했을 때도 깊은 감동을 느꼈다. 여기저기서 단체 카톡방이 울렸다. 너나없이 자기 일처럼 기뻐했고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공유했다.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온라인 서점 홈페이지가 한때 다운될 정도로 그의 소설 주문량이 폭증했다고 한다. 책을 사기 위해 서점 앞에 길게 줄을 선 사진들과 어렵게 ‘득템’한 경험담이 주말 내내 화제가 됐다. “세상이 전쟁 중인데 무슨 잔치냐”며 통상적인 수상 기자회견조차 않겠다는 태도는 타인의 아픔에 천착한 작가다웠다.
우리나라에 첫 노벨상을 안긴 DJ의 노벨평화상은 이만큼 환영받지 못했다. 국내 사정이 복잡했다. 집권 내부는 당시 실세였던 동교동계 수장 퇴진론을 놓고 시끄러웠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이끄는 대여 공세는 거셌다. 노벨평화상이 다른 상에 비해 원체 정치적 논란이 많은 데다 국내 진영 갈등이 더해져 수상 의미는 갈수록 퇴색했다.
여야 지도부가 모처럼 한목소리로 축하한 한강 수상 소식에도 코 빠트리는 이들이 있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같은 이다. 그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두 수상자의 5·18 인연을 거론하며 “5·18이 우리에게 두 개의 노벨상을 안겨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5·18을 폄훼한 자들,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았던 자들, 한강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던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있을까. 아닐 것”이라고 썼다. 이런 정파적 접근은 진영 갈등을 부채질할 뿐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시적 산문’(노벨상 위원회)이라는 문학적 성취보다 그가 다룬 소재만을 부각시키는 납작하고 단선적인 평가다.
그의 수상, 소설에 찬반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낳은 나라’의 품격은 만들기 나름이다. 세계 경제규모 10위권 국가의 풍요로움 속에 우리는 품위를 잃고 있다. 한강의 작품을 다수 낸 문학과지성사 김병익 상임고문은 ‘한국의 새 길을 찾다’(니어재단 편저)에서 “예의(품위) 없음이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허용되고, 합리화되고, 정당화됐다”고 했다. “문화적 허욕과 사회적 무책임, 정치적 팬덤화, 여론의 경망은 지나치게 빠른 성장이 치르는 허망한 대가이며, 성찰의 고통 없이 이룬 욕망의 속모습”이라고도 했다. 국가의 품격을 빛내야 할 정치권, 정치 지도자들이 ‘예의 없음’의 장본인이라는 게 대한민국의 불행이다.
지면에 담기 민망할 정도로 상대 진영을 향해 내뱉는 정치인들 말은 ‘흉기’가 된 지 오래다. 수십년 한솥밥 먹은 선배 정치인을 ‘잔당’(쳐 없애고 남은 무리)이라고 서슴없이 부르는 정치인이 거대 야당 수석최고위원이다. 사기 전력이 있는 선거브로커의 폭로성 발언에 연일 정치권이 들썩인다. 그와 엮인 내로라하는 정치인들 해명은 군색하다. 미처 대응도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대통령실 모습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계엄, 탄핵 같은 국가 비상사태를 뜻하는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다니는 마당에 품위를 찾는 건 과욕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거친 탁류를 잠시 벗어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준 성찰과 공감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자성하고 성찰해야 할 곳은 정치권이다. “온 국민이 기뻐할 국가적 경사” “국민에 큰 위로” “우리에게 불가능과 한계는 없다는 걸 보여줬다”는 자신들의 축하 메시지가 부끄럽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