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를 둘러보면 상당수의 건물을 덮고 있는 재료는 유리다. 그런데 건물 전체를 덮을 만큼 큰 유리가 본격적으로 생산된 시기는 19세기 초였다. 그래서 유리는 철근콘크리트, 엘리베이터와 함께 현대 마천루가 탄생하게 된 핵심 요소로 꼽힌다.
유리가 건물 외장재로 사용되기 전까지 건축의 주요 재료는 돌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건물은 어떤 식으로든 중력에 순응한 형태여야 했고 그 모습도 육중했다. 반면 유리는 개방감을 가지면서 동시에 건물 내부의 열과 공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어느 정도 막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건축물의 외관에 유리를 사용함으로써 투명한 공간을 구현할 수 있게 됐다는 건 근현대 건축가들에게 너무 매력적이었다. 심지어 유리를 통해 건물 안팎의 시각적 경계가 사라진 모습은 마치 건축물이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근현대 건축가들에게 유리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또 다른 이유는 기계로 생산된 재료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유리는 강철과 함께 그 자체로 모더니즘(Modernism)을 대변하는 재료다. 독일 근대건축의 거장이자 현대 마천루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미스 반데어로에(Mies van der Rohe)는 “이제 우리는 공간을 표명하고 그것을 열어젖혀 풍경과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며 유리의 가능성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Less is More(레스 이스 모어, 적을수록 좋다)”라는 모더니즘 건축의 강령을 만들어낸 미스 반데어로에는 1958년 뉴욕 맨해튼에 준공된 시그램빌딩을 통해 현대 마천루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구현했다. 산업재료인 청동판과 호박색의 유리를 통해 완벽한 비례감과 모더니즘 건축의 미학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시그램빌딩은 단숨에 전 세계 마천루 디자인의 표준이 됐다. 심지어 그의 이름을 딴 ‘미시안(Miesian)’이라는 새로운 건축사조가 탄생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미시안 건축이 있다. 바로 청계천과 삼일대로가 만나는 교차로에 있는 삼일빌딩이다. 그런데 삼일빌딩의 설계자는 미스 반데어로에도, 그렇다고 미시안 건축을 전 세계에 퍼뜨린 다국적 건축설계회사 SOM도 아닌 김중업이다. 심지어 김중업은 미스 반데어로에와 함께 근대건축을 주도했던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제자였다.
김중업이 자신과 접점이 없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마천루 디자인을 삼일빌딩 설계에 적용한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다. 그중 하나는 김중업 자신이 시그램빌딩이 보여주는 근대적인 미학과 비례에 매료됐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설계를 의뢰한 삼미그룹이 건물을 발주할 당시 삼양 특수강에 합작 투자하면서 강철 산업에 뛰어들었다는 정황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본사 건물은 기업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래서 기업 간의 자존심이 건물의 높이 경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삼일빌딩이 지어질 때도 쌍용그룹이 18층, 한진그룹이 23층 사옥을 준공하면서 나름의 높이 경쟁이 벌어졌다. 삼미그룹의 창업주인 김두식도 이 경쟁에 뛰어들었고 최종 승자가 됐다.
높이 114m의 삼일빌딩은 1971년 준공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그리고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건물이 됐다. ‘국내 최고층’이라는 지위는 1978년 롯데호텔(150m)이 완공될 때까지 유지됐는데, 건물의 용도를 업무시설로 한정하면 여의도에 63빌딩(249m)이 지어진 1985년까지 늘어난다. 이외에도 삼일빌딩은 철골조 유리 커튼월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건물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삼일빌딩은 시그램빌딩을 닮았다. 하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다른 점도 있다. 대표적으로 유리창의 비례가 시그램빌딩에 비해 세로로 더 길다. 이는 높이 3.3m에 불과한 기준층이 더 높아 보이도록 하기 위한 설계자의 고민이 담긴 결과다. 실제 김중업은 일반적인 업무시설보다 낮은 기준층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철골로 된 보(beam)에 구멍을 뚫어 설비 덕트(duct)를 설치했다. 2019년 삼일빌딩의 리노베이션 설계를 맡은 최욱(원오원아키텍스)과 정림건축은 천장을 노출하고 바닥 높이를 낮춤으로써 개방감을 추가로 확보했다.
두 번째로 삼일빌딩은 시그램빌딩에 비해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과도 같은 날카로운 인상이 덜하다. 가장 큰 이유는 건물 입면에 붙은 I-형강 멀리언(mullion)의 둥근 마감 때문이었다. 멀리언은 건물 외벽에 일정 간격을 두고 수직으로 세워진 부재인데 외장재를 나누거나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당시 김중업은 일본에서 생산된 둥근 형태의 재료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리노베이션 때 설계자들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I-형강 멀리언을 날렵한 형태로 다시 제작해서 설치했다.
마지막으로 철골 구조로 지어진 삼일빌딩에서 엘리베이터, 화장실과 같은 설비가 집중된 코어(core) 부분은 일반콘크리트가 쓰였다.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때문에 삼일빌딩은 정면에서 보이는 세련된 외관과 달리 다른 각도에서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리노베이션 과정에서 설계자들은 건물의 둔중한 인상을 없애고 전체적인 통일감을 주기 위해 콘크리트 코어를 검은색 금속패널로 감쌌다.
‘리-아이코나이즈(Re-Iconize)’라는 콘셉트로 진행된 리노베이션 작업은 1970년대 초 기술적, 현실적인 이유로 김중업이 실현하지 못한 한계를 보완해 주었다. 동시에 건물의 소유주가 개별 기업에서 자산운용사가 참여한 사모펀드로 바뀌면서 임차인들이 선호하는 ‘요즘 건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산운용사 입장에서는 삼일빌딩이 서울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의 지위를 되찾는 것보다 임차인을 수월하게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 한 개 층이었던 로비를 부분적으로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확장해 개방감을 키우고 건물 전면에 성큰가든(Sunken garden)을 새롭게 만들어 지하 1층으로의 접근성을 높였다.
미시안 건축은 건축에서 상징을 없앰으로써 전 세계 어느 곳에나 지어질 수 있는 탈(脫)장소성을 지향했다. 하지만 ‘시간의 상징’만큼은 박멸하지 못했다. 리노베이션을 통해 요즘 건축이 된 삼일빌딩은 차량에서 보행 중심으로 바뀐 주변 상황과 확실히 더 잘 어울리게 변했다. 그럼에도 건물의 세련된 검은색 외관과 반복적인 창문은 빠름과 효율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산업화 시대를 여전히 떠오르게 한다. 마치 흑백 사진을 컬러 사진으로 바꾸는 기술이 등장했음에도 어떤 사진은 흑백으로 보아야 더 감동적인 것처럼 삼일빌딩은 서울의 근대화를 상징했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삼일고가와 함께 봤을 때 진면목이 드러난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