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진행 중인 국정감사에선 막말이 오가는 중이다.
어떤 의원은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무형문화재 전통공연·예술 분야 전승자 오찬 간담회 중 진행된 공연을 거론하며 “(청와대를) 갑자기 기생집으로 만들어 놓은 거잖아요. 이 지X들을 하고 있다”고 센소리를 냈다. 또 어떤 장관은 “군복 입고 할 얘기 못 하면 더 병X이라고 생각한다”며 욕설을 입에 담았다.
김건희 여사와 이재명 대표를 둘러싼 논란으로 점철된 국정감사에서 존중은 찾아보기 힘들고, 격앙된 표현이 난무한다.
여야가 그렇게 극한의 대립과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던 와중, 한순간, 국감장에서 예정에 없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순간이었다. 이번 국감에서 유일하게 여야가 한마음이 된 때였다.
노벨위원회는 한글날의 다음 날, 번역가의 손길을 거치긴 했지만, 한글로 소설을 쓴, 기존 문학계의 통념상 어린 나이인 53세의 동양 여성작가를 문학상 수상자로 호명했다.
아들과 함께 저녁을 먹던 한강은 놀랐고,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게 된 국민은 흥분했다. 오랜만에 독서 열기가 불며, 책 읽는 사람이 없어 흙빛이었던 서점과 출판사, 인쇄 공장엔 다시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흥분이 채 식기도 전에 온라인에선 축하의 말들과 함께 작가에 대한 날 선 비난이 바이러스처럼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댓글러들은 한 작가가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5·18과 4·3을 소재로 삼은 것에 대해 비판을 가했고, 이는 이내 지역 비하로 이어졌다. 가부장제를 꼬집은 소설 ‘채식주의자’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이분법적 사고 앞에서 언어는 투쟁의 수단으로 변질해 간다. 자유를 앞세워, 스웨덴 한림원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가한 소설에, 스스럼없이 언어의 칼을 들이댄다.
세계가 인정한 사유(思惟)의 결과물을 인정할 수 없는 누군가는 이를 사유(私有)로 취급한다. 한강이 아닌 중국 작가가 문학상을 받았어야 한다는 어떤 작가의 발언엔 헛웃음이 난다.
애써 한 작가의 영예를 깎아내리며, 상을 번역가에게 줘야 한다는 촌평은 당혹스럽다. 정작 한강의 책을 영문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는 “부실한 번역은 우수한 작품을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훼손할 수 있지만, 반대로 세계 최고 수준의 번역이라도 보잘것없는 소설을 고전 명작처럼 포장할 수는 없다”고 했다. 심지어 비판자들은 노벨위원회를 페미니즘에 물든 기회주의 집단쯤으로 평가절하함으로써 작가의 수상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정쟁과 막말은 국회를 넘어 온라인에서 재현되고 있다. 너와 나를 섞일 수 없는 물과 불로, 0과 1로 나누는 이분법 사회가 된 듯하다.
하루가 멀다고 잔혹한 살인 사건, 패륜 범죄 소식이 전해진다. 욕설과 비난의 언어로 점철된 사회에 폭력이 난무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따뜻한 말이 귀한 시대다. 좋은 단어, 아름다운 문장을 찾아보기 힘들고 가슴을 후벼 파는 횡행한 단어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온라인에서 떠도는 댓글이 작가의 성취를 훼손할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허투루 쓴 비난이 긴 사유의 결과물을 압도할 리 없다. 다만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라져 싸우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안타까울 뿐이다.
책 읽기 좋은 가을, 비난을 멈추고, 좌파니 우파니 싸우는 정쟁에서 벗어나 불어온 독서 바람에 편승해 봄은 어떠한가. 한강의 소설이 아니어도 좋다. 좋은 단어는 더 좋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깊이 있는 긴 문장은 더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문학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지길, 다른 이의 생각을 좀 더 귀담아 듣게 되길, 욕설과 비난을 걷어내고 말맛이 살아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본다. 한강 작가의 바람도 그러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