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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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에 치인 여대생, 속옷 벗겨졌는데…'단순 교통사고' 종결

속옷서 남성 DNA 검출…"인근 공단 외국인 노동자가 여대생 성폭행" 소문[사건속 오늘]
15년 만에 검거된 스리랑카인…1심·2심 이어 무죄, 현지 법정서도 '증거불충분' 석방

26년 전 오늘, 대구의 한 대학교 축제 마지막 날 캠퍼스 내 주점에서 술을 마신 뒤 친구와 귀갓길에 올랐던 정 모 양(당시 20세)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이날 정 양은 캠퍼스 내 주점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오후 10시 40분쯤 친구 A 군을 데려다준다며 부축해 학교를 나섰다. 캠퍼스를 나서는 모습이 친구들이 목격한 정 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유튜브 캡처

술은 마셨지만 만취 상태는 아니었던 정 양과 달리 A 군은 술에 취해 있었다. 30분 뒤쯤 대학 정문에서 500m 떨어진 길가에서 졸다 깬 A 군 옆에 정 양은 없었다.

 

A 군은 정 양에게 삐삐로 연락했지만 답이 없자 귀가했다. 그로부터 6시간 뒤인 오전 5시 10분쯤 정 양은 고속도로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교통사고 다음 날 현장서 '정 양 속옷' 발견…경찰, 단순 교통사고 처리

 

정 양을 가장 마지막에 본 사람은 트럭 운전기사였다. 기사는 새벽 5시 반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 앞에 사람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왔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피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운전기사에 따르면 사고 직전 정 양이 중앙분리대 쪽에서 갓길 방향으로 건너고 있었다. 트럭에 치인 정 양은 뒤이어 달려온 차량에 2차 교통사고까지 당했다.

 

다음 날 사건 현장에서 정 양의 속옷과 화장품, 찢긴 리포터 등이 발견되면서 죽음을 둘러싼 의문이 제기됐다.

 

하지만 경찰은 유가족이 직접 건넨 정 양의 속옷에 대해 국과수 분석을 진행하지 않은 채 교통사고로 사건을 종결했다.

 

부검의는 소지품이 놓인 곳 반대편으로 가려고 한 점이 일반 교통사고와는 다르다며 사고 전 긴박한 상황에 놓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인근 공단에서 일하던 외국인 근로자들 사이에서는 정 양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성폭행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국과수 분석 결과 정 양 속옷서 男 DNA 검출…스리랑카인 근로자 K 씨 것

 

정 양의 아버지는 헌법소원까지 내면서 재조사를 요구했다. 1년 3개월 뒤 국과수는 속옷에 대한 유전자 분석에 들어갔다. 그 결과 속옷 두 점 모두 정 양의 것으로 확인됐다. 속옷에서는 신원불명의 남성 DNA도 함께 검출됐다.

 

누구의 유전자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고, 유족들의 끈질긴 재수사 요구에 2013년 9월, 정 양의 속옷에서 나온 유전자와 일치하는 남성의 정체가 밝혀졌다.

 

스리랑카 근로자 K 씨였다. 이는 성폭행 소문에 등장한 가해자 3명 중 한 사람이었다. 검찰 조사 결과 K 씨는 다른 스리랑카인 공범 2명과 정 양을 성폭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K 씨는 지난 2010년 미성년자에게 성 매수를 제안했다가 벌금형을 받았고, 2013년에는 20대 여성을 강제 추행했다가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가 이 사건 피의자로 덜미를 잡힌 건 다른 성범죄로 조사를 받다가 DNA가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성폭행에 가담한 일행 2명은 불법 체류 문제로 2013년과 2005년에 스리랑카로 추방된 상태였다.

여대생 사망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된 스리랑카인 K(47)씨가 지난 2015년 8월 11일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고 대구지법 법정을 나오고 있다. 뉴스1

1·2심 무죄 이어 대법원서 확정…스리랑카 법정에 다시 선 K, 증거불충분 무죄

 

검찰은 사건 발생 15년 만에 K 씨를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기소하고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검찰이 K 씨에 대해 강간죄가 아닌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긴 이유는 공소시효 때문이었다. 강간죄의 공소시효는 5년으로, 이미 시효가 끝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K 씨를 처벌하기에 턱없이 짧았던 강간죄처럼 특수강간도 10년에 불과했다. 사건이 1998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2013년에 검찰로서는 공소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의 중죄를 적용해야 그나마 처벌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예상과 달리 K 씨는 1심에 이어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17년 7월 대법원에서도 무죄가 확정되며 처벌을 피하게 됐다. 대법원 판결 직후 K 씨는 스리랑카로 강제 출국 조치됐다.

 

그리고 1년 3개월 뒤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법무부는 스리랑카 검찰과 공조로 K 씨가 스리랑카 법정에 섰다고 밝혔다.

 

스리랑카는 성범죄에 특히 엄격해 강간은 최소 7년 이상 20년 이하의 징역형과 벌금형에 처한다. 공소시효는 20년에 달한다. 2006년에는 자국민이 해외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를 국내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됐다.

 

우리 검찰은 현지에서라도 법의 처벌을 받도록 하기 위해 검사, 법의학자들을 중심으로 팀을 꾸려 스리랑카 검찰 측에 공조 수사를 요청하며 꾸준히 의견 교환을 해왔다.

 

스리랑카 검찰도 대구의 사건 현장과 관련자들을 조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섰다.

 

법무부는 K 씨를 강간죄로 기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스리랑카 검찰은 K 씨의 DNA가 피해자의 몸이 아닌 속옷에서 발견된 점과 당시 강압적인 성행위를 인정할 추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성추행죄로 기소했다.

 

스리랑카 1·2심 재판부는 2021년 12월과 2022년 11월 증거불충분 등을 이유로 K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무부 이지형 국제형사과장 등은 2022년 12월 스리랑카 대검찰청을 방문해 검찰총장에게 K 씨 사건의 상고를 요청했다. 이에 스리랑카 검찰도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다.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