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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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난당한 ‘채식주의자’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인 2023년 11월 광주광역시에서 A씨가 절도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2021년 9월부터 약 2년간 광주 시내 도서관 8곳에서 책 1500여권을 훔쳐 달아난 혐의를 받았다. 경찰은 일용직 근로자인 A씨가 이 책들을 어딘가에 팔아 부당 이익을 챙긴 것으로 의심하고 그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했다. 뜻밖에도 A씨의 집은 서적으로 가득차 있었고, 훔친 책들 또한 고스란히 보관 중이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책을 읽고 싶은데 돈이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옛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안타깝긴 하지만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책 도둑도 도둑이란 점은 분명하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지난 13일 스웨덴 공영방송 SVT와 인터뷰를 하는 모습. 뉴스1

2017년 2월 모 지방대 도서관에서 책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시가로 3만원가량 하던 한국사 문제집인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의 필독서였다. 서적 임자 B씨는 도서관 옆에 ‘잃어버린 책을 찾아달라’라는 제목의 벽보를 붙였다. 기다려도 응답이 없자 B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얼마 후 C씨가 문제의 책을 들고 B씨 앞에 나타났다. “우연히 벽보를 본 뒤 양심의 가책을 참을 수 없었다”며 서적을 반환했다. 자신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데 돈이 없어 책을 사지 못했다는 C씨의 하소연에 B씨는 그냥 용서해주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경찰이 이미 수사에 착수해 범행 당일 폐쇄회로(CC)TV 화면 확보 및 분석까지 다 마쳤다는 점이다. 결국 C씨는 경찰에 자수했고 B씨도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수사 담당자에게 전달했다. 경찰은 여러 정황을 감안해 C씨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는 대신 즉결심판에 넘기는 것으로 최대한 선처했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경북도청 본청 1층에는 ‘K창’이란 이름의 도서관이 있다. 원래 당직실이 있던 곳인데 이철우 도지사의 지시에 따라 도서관으로 변경됐다. 경북도는 “도민을 위한 열린 도서관”이라며 “그냥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도청을 방문하는 도민이 책 속에 오래 머물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로 만들어졌다”고 강조한다. K창 입구에는 ‘봤던 책은 기부하고, 읽고 싶은 책은 가져가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도서관에 비치된 서적을 외부로 반출하거나 심지어 이용자가 그냥 자기 것으로 삼아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이다. 대놓고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고 만방에 선언한 셈이다. 도서 판매량도, 독서 인구도 해마다 줄어드는 가운데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소설 ‘채식주의자’를 비롯한 그의 대표작들을 읽으려는 이들이 부쩍 늘어난 가운데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의 책 진열대 위에 ‘한 작가의 서적은 품절 상태’라고 알리는 팻말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지난 15일 벨기에 수도이자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본부가 자리한 브뤼셀 소재 한국문화원에서 도난 사고가 벌어졌다. 문화원 내 도서관에 비치된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2007) 한 권이 사라진 것이다. 한 작가는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고 ‘채식주의자’는 수상에 결정적 역할을 한 작가의 대표작이다. 외부인에 의한 절도 범죄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도서관 안에 CCTV가 설치돼 있으니 수사를 해보면 범인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겠으나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고 한다. 문화원 관계자는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아 발생한 해프닝으로 여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강 신드롬’의 여파라니, 한국인으로선 되레 어깨가 으쓱해지는 대목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