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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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진의시네마포커스] 잠자리 구하기

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상 이런저런 영화들을 보다 보면 큰 고민 없이 쉽게 쓰인 이야기를 많이 만나게 된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 영화 내내 깊이 있고 팽팽한 질문을 던지다가 마지막에 뒷심 부족으로 안일한 결말을 맺는 영화도 적지 않다. 그러나 때로는 감독 자신의 몸과 영혼을 통째로 갈아 넣었구나 싶은 영화들도 만나게 된다. 그럴 때가 평론가로서, 혹은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가장 전율을 느끼는 순간인데, 근래 나에게는 부산국제영화제,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대만국제영화제 등 아시아 유수의 영화제에 거듭 초청받고 금주 개봉한 홍다예 감독의 ‘잠자리 구하기’가 그런 영화였다. 이 영화는 감독이 자신과 친구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기 시작한 고3 시절부터 재수생 시절을 거쳐 대학에 진학해 고교 시절 시작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기까지의 8년간의 시간과 기억을 기록한 영화이다.

영화는 입시지옥을 통과하는 청소년기의 성장통을 다루지만 종결된 고통의 시간을 반추하는 일반적인 성장 서사의 고백이나 회고담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감독이 주장하듯이 이 영화는 차라리 ‘반-성장영화’(anti aging-story)에 가깝다. 감독과 친구들에게 이 너덜너덜한 시간은 아직 종결되지 않은 시간이다. 청소년기의 열병 같은 시간을 기록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 영화가 심층에서 다루는 것은 인간의 삶 내내 지속될 실존의 고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과 우울의 터널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인간이 생을 다할 때까지 거듭 물어야 할 질문이다. 거기에 정답이 없음은 물론이다. 터널을 통과하면 또 다른 터널이 나올 것이고 우리는 다시 그 터널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실존의 고통과 불안 속에서조차 존재하는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의지적 행위 아닐까? 영화에서 누군가 말했듯이 자살을 생각했을 때 너무도 환했던 햇빛의 기억으로 우리는 각자의 산을 넘어가야 한다. 젊은 감독에게 “성장은 필연적으로 어떤 실패를 포함한다”는 깨달음이 너무 빨리 왔다는 것이 못내 안쓰럽지만 그렇기에 그것은 당신만의 고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감독의 팔에 난 상처들을 보면서 언젠가 내 아들의 팔에서 보았던 상처를 떠올렸고 이어서 내 몸에도 그 비슷한 상처를 남기려 했던 젊은 시절의 나를 기억했다.

이 영화는 기억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카메라 앞에 선 친구들은 힘겨웠던 그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각자의 일기장에, 카메라에 그 시기를 통과하던 때의 감정이 기록으로 남아있음에도 그들의 기억 속에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시간은 없다. 그것은 영원히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언젠가 수면 위로 떠오를 망각 속에 가라앉은 것일까? 카메라는 망각된 시간, 사라진 시간을 기억하며 기록한다. 망각의 그물 안에 죽지 않고 존재하는 그 시간을.

맹수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