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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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의감성엽서] 오, 아름다운 가을날

올가을은 유난히 기분이 좋다. 온몸에서 간지럼 타는 웃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길을 걷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창문 사이로 보이는 가을 풍경에, 가을 햇살에, 가을 색채에 한참 시선을 빼앗긴다. 오, 아름다운 가을날! 이제는 나도 기쁨과 슬픔과 음악을 구별 짓고 싶지 않은, 구별하기 싫은 나이에 이른 것인가. 보이는 것, 느끼는 것, 스치는 모든 것이 하나의 멜로디, 리듬으로 다가와 애잔하게 반짝이고, 눈물겹게 사랑스럽다. 실수투성이, 부끄럽던 지난날들도 볼품없이 망가져 원상 복귀가 힘들었던 그 아픈 시절도 ‘들꽃 만발한 거친 황야’처럼 있는 그대로의 멋으로 아련하게 다가와, 고질적인 내 모든 트라우마를 이용해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길 좋아했던 신(神)조차도, 나를 파먹고 배고픈 배를 채우던 일상의 애벌레들까지도, 그 속에서 울며 겨자 먹기식 나태로 대응했던 내 못난 패배감까지도 다 용서가 되고, 나도 모르게 괜찮아, 괜찮아, 다독이게 된다.

내게 봄, 여름, 겨울이 시를 쓰게 하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시를 살게 하는 계절인가? 시를 쓰지 않고도 시의 한때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이토록 몸과 마음이 절절하고, 유연하고, 불꽃이 튀듯 탁탁 튀어 오른다.

늘 반복해서 맞는 계절임에도 올가을엔 유독 ‘나 자신 지우기’와 ‘타자와 동행하기’가 잘된다. 누구를 만나도 설사 그를 평소에 많이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기분이 가라앉거나 편협해지지 않는다. 더 적합한 형용사나 부사, 수식어를 찾지 않아도 먼바다에서 집으로 돌아온 선원처럼 모든 게 새롭게 다가오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마치 가을이 내게 마법이라도 거는 것처럼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오직 현재만이, 현재의 선량한 풍경만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곳에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지구 곳곳에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크고 작은 장례식들이 ‘전쟁’과 ‘이상기후 위기’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줄줄이 행진하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느끼는 가을 하늘과 바람, 햇살, 구름은 너무도 아름다워 그 마법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오늘도 나는 가을 벌판을 돌아다니며 오직 절망뿐인 듯한 세상에서 희망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이 가을도 곧 끝날 것이고, 매일매일 나를 접었다 폈다 하며 산 무수한 시간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운이 좋아 몇 편의 시로 남게 된다면 언젠가는 그 속에서 순환의 푸른 잎사귀들이 돋아나겠지. 지구는 둥글고, 어김없이 오, 아름다운 가을날은 또다시 돌아올 테니까.

 

김상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