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유지돼온 서울의 시내버스 노선 체계가 전면 개편된다. 버스운송사업자들에 대한 재정지원은 ‘사후정산제’에서 ‘사전확정제’로 바뀐다. 건전한 민간자본만 버스업계에 진입할 수 있도록 기준도 보다 엄격해진다.
서울시는 시내버스 준공영제 시행 20주년을 맞아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혁신방안을 추진한다고 22일 발표했다. 과거 민영제로 운영됐던 서울 시내버스는 2004년 7월 준공영제로 개편됐다. 준공영제로 전환한 지 20년이 지나면서 시의 과도한 재정부담과 민간자본 유입에 의한 공공성 훼손, 공급자 위주의 버스 노선 운영 등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시는 ‘재정’과 ‘공공성’, ‘서비스’ 3대 분야의 혁신을 추진하기로 했다. 운송수지 적자분을 정산 후 전액 보전해준 사후정산제를 다음 해 총수입과 총비용을 미리 정해 그 차액만큼만 지원하는 사전확정제로 바꾼다.
기존 사후정산제는 버스회사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비용 절감에 노력을 기울일만한 유인 요소가 없었다. 사전확정제로 변경되면 버스회사가 수입 증대와 비용 절감을 위해 자발적으로 경영 혁신에 힘을 쏟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시는 설명했다. 시는 사전확정제로 전환 시 정산업무 간소화 등으로 연간 최대 180억원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인건비와 연료비 역시 상한선을 정해 보전해주는 표준단가 정산제로 전환한다. 기존 정산 방식은 인건비·연료비 전액을 실비로 보전해주는 식이었다. 시는 이를 통해 연간 150억원가량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시는 버스의 공공성을 높이고자 민간자본 종합관리대책을 마련했다. 현재 서울 버스회사 6곳이 사모펀드를 비롯한 민간자본에 인수된 상태다. 민간자본이 버스회사를 안정적인 투자처로 인식해 인수에 나선 결과로 해석된다. 이로 인해 공공성 훼손 우려가 일었다. 시는 민간자본 진입 전·후와 이탈 시 등 단계별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관리를 강화한다.
진입 기준을 엄격하게 만들고 사전심사제도를 도입해 불건전·외국계 자본과 과다영리 추구 자본의 진입을 사실상 제한한다. 국내 자산운용사의 경우 설립 2년 이상 지난 곳에만 인수 기회를 준다. 이미 진입한 민간자본에 대해서는 배당성향 100% 초과 금지, 1개월분의 현금성 자산(운전자본) 상시 보유 의무화 등을 도입해 배당수익을 제한하기로 했다.
아울러 민간자본이 버스회사의 알짜 자산 등을 매각·청산한 뒤 업계를 이탈하는 일명 ‘먹튀’ 행위를 하지 못 하도록 ‘원천 차단’ 조치를 취한다. 임의로 차고지를 매각하면 차고지 임차료를 지원하지 않고, 최초 진입 후 5년 내에 재매각하거나 외국계 자본에 회사를 팔 경우 회사 평가에서 5년간 200점을 감점, 먹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를 만든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날 기자설명회에서 “서울 시내버스에 민간자본이 이익을 취하겠다고 들어오면서 통탄할만한 일들을 겪었다”며 “한마디로 ‘돈을 벌러’ 들어오지 못 하게 하겠다는 게 제 굳은 결심”이라고 강조했다.
버스 노선 개편은 서울시민 누구나 걸어서 5분 안에 대중교통에 접근할 수 있는 ‘대세권’(대중교통세력권)을 실현한다는 기치 아래 이뤄진다. 시와 서울시버스운송사업조합은 최근 버스 노선체계 전면 개편을 위한 용역을 발주했다. 이를 통해 장거리·중복 노선을 손보고, 노선 굴곡도는 완화할 방침이다. 2층 버스의 경우 차내 혼잡도가 극심한 간선버스 중 굴곡도가 낮은 노선을 중심으로 투입한다. 자율주행버스는 새벽이나 심야시간대에 청소·경비노동자 탑승이 많은 노선에 우선적으로 공급한다. 고령인구가 많거나 사회복지시설 인근 지역에는 수요응답형 교통수단을 투입해 교통약자에 대한 교통복지를 실현한다.
시는 지난 1월부터 이번 혁신방안을 놓고 서울버스조합 등 관계자들과 협의를 이어왔다. 민간자본 종합관리대책은 이달부터, 노선 개편과 사전확정제 실시를 위한 제도 정비는 내년부터 추진한다. 노선 개편은 2026년 1월부터 시행을 목표로 설정했다. 오 시장은 “버스 준공영제 20년을 맞아 재정, 공공성, 서비스 세 가지 혁신 달성으로 시민이 일상에서 편리함을 느끼고 만족할 수 있는 든든한 교통복지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시내버스로 자리매김하겠다”고 말했다.
서울버스조합도 이날 입장문을 내 “노선 개편이 필요하다는 정책 방향에 적극 찬성한다”며 “이미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했다”고 부연했다. 조합은 다만 버스회사에 대한 시의 재정지원 방식이 사후정산제에서 사전확정제로 바뀌는 것을 두고는 “조합 회원사들의 의견이 충분히 존중돼야 하고, 문제점에 대해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우려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