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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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3A.M.] 행동주의 펀드가 된 MBK

공격적 여론전 통해 판 바꾸는 플레이어로
잠재된 분쟁으로 비즈니스 활용… 원하는 것 얻어

영풍과 고려아연의 전쟁이 한 달이 넘었다. 75년 동업을 하면서 장씨와 최씨 사이 생긴 균열이 근본 원인이었지만, 전쟁을 직접 촉발시킨 것은 사모펀드 MBK파트너스다. 영풍과 고려아연 최대 주주 계약을 체결한 뒤, 공격적인 공개매수를 전개하고 법원에 고려아연의 손발을 묶는 소송을 제기하며 여론전의 전면에 나서는 등 사실상 영풍 측 플레이를 주도하는 키플레이어다.

 

몇 년 새 기업의 경영권 분쟁이 부쩍 잦아졌고 그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사모펀드다. 대표적 사례로, 모녀와 형제가 싸웠던 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에는 글로벌 사모펀드 KKR이 개입했다. 한국앤컴퍼니그룹(옛 한국타이어그룹)에서 벌어졌던 형제의 난 2라운드에도 MBK가 있었다. 한국앤컴퍼니 건에서는 실패했지만 대형 횡령 사건에 휘말린 오스템임플란트는 공개매수로 경영권을 가져왔다.

 

흥미로운 것은 사모펀드들의 전략 변화다. 회사에 투자하거나 인수해서 가치를 올린 뒤 비싸게 되파는 것이 사모펀드들의 전통적인 수익 창출 방법이다. 특히 MBK는 인수전에서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빅베트’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홈플러스 등 초대형 거래를 성사시키면서 ‘빅딜은 MBK’라는 인식을 만들어왔다. 시장의 확고한 주류가 되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MBK가 행동주의 펀드들의 도전자 전략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행동주의 펀드는 단순히 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주 가치를 높이기 위해 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영의 개선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지난 몇 년간 두드러진 변화는 행동주의 펀드가 아주 작은 지분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 그치던 것에서 실제 판을 바꾸는 플레이어로 위상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KKR 출신 이창환 대표가 설립한 얼라인파트너스는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대주주 이수만 총괄프로듀서를 끌어내렸다.(그 과정에서 일어난 주가조작 문제로 카카오 김범수 창업자가 그 후과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어피니티·칼라일 출신 이상현 대표가 이끄는 플래시라이트 캐피털파트너스(FCP)는 KT&G에 사외이사들이 감시를 소홀히 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1조원대 소송을 걸겠다고 위협했고,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 FCP가 지지한 인물을 사외이사로 이사회에 진입시켰다. 최근에는 KT&G의 자회사인 KGC한국인삼공사 지분 100%를 인수하겠다는 도전장을 냈다. 디즈니는 올해 4월 주총을 앞두고 이사진 개편을 요구한 행동주의 펀드에 맞서 다른 행동주의 펀드와 연합하기도 했다.

 

MBK 같은 메이저 사모펀드들은 분쟁을 기회로 삼는 행동주의 펀드의 전략을 주목했다. 사모펀드가 도입돼 20년 동안 국내 PEF 시장에 1조원 넘는 자금을 운용하는 데만 35곳이 되고 대형 매물도 크게 줄면서 새로운 수익원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영권이 취약하거나 갈등이 잠복한 기업을 노리고 분쟁을 비즈니스로 만들었다. 또한 종전의 비밀주의가 아니라 공개적·공격적 여론전을 하는 행동주의 펀드의 방식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이 지난해 속옷 기업 BYC를 상대로 주주 배당 확대 등을 요구하면서 발송한 주주 서한의 제목은 ‘속옷 속에 숨겨둔 부동산’이었다.

 

행동주의 펀드가 시장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사모펀드는 행동주의 펀드의 노선을 도입하면서 시장의 주류와 도전자 사이 경계는 더 무의미해지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 쪽에서는 “우리는 사회 운동가가 아니다. 어느새 선과 악으로 행동주의 펀드를 보고 있는데, 선하고 따뜻한 행동주의 펀드는 없다(이상현 FCP 대표)”고 한다. 포장과 구분을 다 발라내고 나면 결국 적시의 명분과 속도, 실탄을 장착한 실력자만 남을 것이다.


이인숙 플랫폼9와4분의3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