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언제 노벨상을 받나’, 이런 말을 듣다 보니 가을마다 업계 선후배들의 어깨가 무거웠는데, 한강 작가 덕분에 잠시 숨 고를 여유가 생겼죠.”
정하연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부교수는 23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노벨상을 계기로 번역계가 성과주의에서 벗어나 새롭게 도전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 교수는 한국문학 전문번역가로, 김훈 작가 ‘칼의 노래’,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 등을 영어로 옮겼고 대학원에서 한영번역을 가르치고 있다.
정 교수는 한 작가의 수상 당시 업계 전체가 들썩였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학생들도, 나도 큰 격려를 받았다”며 “우리 문학이 보편성이 있고, 외국 독자들이 읽고 느낄 수 있는 울림이 있다는 것을 확인받은 기분”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노벨상을 계기로 한강 작가의 책을 해외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데버라 스미스 번역가도 주목받으면서, 정부가 출판·번역 지원에 소홀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국정감사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번역원)의 내년도 번역 인력 양성 사업 예산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정 교수는 “지난 30여년 동안 정부에서 번역계에 굉장한 공을 들인 것은 사실이고, 이번 수상은 그 지원의 결실”이라면서도 “번역을 통해 책이 출판돼서 해외에서 많이 팔리거나 수상을 받지 않으면 지원금을 받은 이유를 증명할 수 없었다는 어떤 압박감이 강했다. 이것이 실적주의로 이어졌던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문학 번역을 지원하는 곳은 교보생명의 공익재단인 대산문화재단과 번역원 두 곳이 사실상 전부다. 번역가들은 이곳 지원을 받아도 번역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렵다고 말한다. 정 교수는 “선수금 몇백만원을 받고 200∼300페이지짜리 장편 소설 번역에 착수하면 1∼2년이 걸린다. 모든 과정이 끝나면 1000만~1300만원 정도를 받는다”며 “다른 일도 해야지만 먹고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원금이 절실하다 보니 번역원 지원 대상 선정 과정은 대회처럼 돼 버렸다. 여기에 최근 번역원 출판지원사업이 번역가가 아닌 해외 출판사만 신청할 수 있게 바뀌면서 지원은 더욱 ‘잘 팔릴 책’에만 쏠리게 됐다. 정 교수는 “30년 전에 비하면 예산은 늘었지만, 패기 있는 신진 번역자가 원고를 발굴해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히려 줄었다”고 아쉬워했다.
케이팝을 비롯한 한국 문화가 세계에서 통하는 트렌드가 된 만큼, 정 교수는 국내 문학도 ‘트렌드’를 만들어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비주류 장르나 신진 작가들을 해외에 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전 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서로의 트렌드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며 “(한국 문학 소개를) 해외 출판사의 ‘간택’을 받은 작가들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출판계와 번역가들이 주도적으로 한국 문학과 작가들이 어떠한 맥락과 폭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 지원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지금까지 이런 역할은 유튜브에 한국문학 소개 영상을 제작하는 것부터 해외 홍보행사 개최까지 번역원에서 직접 수행해 왔다. 정 교수는 “그러다 보면 한국의 문화 단체가 자신들의 색깔을 보여주러 온다는 느낌보다는 국가대표들이 오는 느낌이 더 컸다”며 “민간 프로젝트를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간다면 이런 활동들이 조금 더 특색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문예지를 만든다든가, 한국문학 전문 해외 출판사를 만든다든가, 이번 기회에 이런 젊고 패기 있는 프로젝트들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며 “(실패할) 위험은 있겠지만 이런 프로젝트야말로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