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열악한 응급의료체계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미력이나마 보태려 합니다.”
최근 전북 정읍시 정읍아산병원에서 정년 퇴임하고 지역 보건지소에서 인술을 베풀게 된 임경수(67·사진) 전 병원장은 23일 “의료 취약지역 중 한 곳인 고부보건지소에서 환자를 돌보며 여생을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임 전 원장은 최근 정읍시 공모를 통해 다음 달 1일 고부보건지소장으로 임용돼 진료를 재개한다. 젊은 의료진과 협업하며 멘토링을 통해 의학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고 보건지소 내 의료 시스템도 개선할 각오다.
고부보건지소는 공중보건의사의 지속적인 감소로 6명의 공중보건의가 순회진료하고 있는 관내 15개 보건지소 중 하나다. 전문의가 없어 지속적인 치료·관리를 필요로 하는 만성질환자들이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형 종합병원장 출신 의사를 맞이하게 돼 가뭄 속 단비를 맞는 셈이다.
임 전 원장은 평범한 의료인이 아니라 대한응급의학회 창립 멤버로서 한국형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앞장선 응급의료계의 거장으로 꼽힌다. 연세대 의대를 나와 1989년 연세대 원주세브란스병원 최초로 응급의학과 교수에 임용된 그는 응급의학 교실을 만들어 심폐소생술 교육체계를 구축했다. 1996년 서울아산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로 부임해 응급실장 등을 역임하면서 응급의료 전산화를 통해 의료정보를 신속히 공유하게 했다. 응급의학 전문의 제도 신설과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필수적인 기금에 관한 법률 제정도 끌어 냈다.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과 대한외상학회 회장, 대한재난협의회 회장, 국제재난협회 회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아산재단으로부터 “꿈을 원 없이 펼쳐보라”는 제안을 받아 2022년 정읍아산병원장에 부임했다. 하지만 열악한 지역 의료 여건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그는 “소아과와 마취과, 비뇨기과 등 많은 분야 의료 인력이 최장 7년이나 공백 상태일 정도로 지역 인프라가 매우 취약해 충격을 받았다”며 “이에 ‘실버 파워’를 한번 키워보자고 후배들에게 제안해 간신히 공백을 메웠다”고 전했다.
임 전 원장은 이 지역 최초로 보호자나 간병인 대신 전담 간호인력이 24시간 환자를 볼보는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병원을 갖춰 경제·심리적 부담을 덜어줬다. 올해 4월에는 보건복지부가 지역 완결적 필수의료체계 구축을 위해 선정한 ‘지역 책임 의료기관’에 꼽혔다.
그는 최근 자신의 길을 다시 정했다. 정읍에 남아 지역 주민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서울에서의 편한 생활, 거액의 연봉을 포기하고 지역의 작은 보건지소장에 지원한 것도 인술을 베풀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오랜 다짐에서다.
임 전 원장은 “초고령화 사회가 가속함에 따라 병원 접근성이 낮은 노인 등 의료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게 국가적 과제가 됐다”며 “저와 같이 은퇴한 전문의 등이 청진기를 들 힘만 있으면 보건지소에서 환자를 돌봄으로써 진료 공백을 메우는 것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