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엔 ‘국제연합일’이란 이름의 공휴일이 있었다. ‘유엔의 날’ 또는 ‘유엔절’이라고도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10월24일 유엔이 창설된 것을 기리기 위한 기념일이다. 이승만정부는 6·25전쟁 초반인 1950년 9월 국제연합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2년 전인 1948년 유엔은 남한 정부를 ‘한반도 내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규정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1950년 6월25일 북한이 기습 남침을 자행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유엔이 회원국들에게 남한을 돕기 위한 병력·물자 및 의료 지원을 권고하고 나선 근거로 작용했다. 유엔군 참전 덕분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한국이 국제연합일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6·25전쟁이 종전 아닌 휴전으로 끝나고 남북 간에는 극심한 체제 경쟁이 벌어졌다.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이 체제 경쟁의 가장 중요한 무대로 떠올랐다. 이들은 미국은 물론 소련(현 러시아)과도 거리를 두는 이른바 ‘비동맹’ 노선을 표방했으나, 과거 서방 국가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아픈 경험 때문인지 정서적으로는 공산주의 국가들과 더 가까웠다. 비동맹 국가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넓혀 갔다. 급기야 1970년대 중반에는 북한이 유엔 산하 국제기구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국만이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라더니 어떻게….’ 극심한 배신감을 느낀 당시 박정희정부는 1976년 국제연합일을 공휴일에서 빼 버렸다.
국제연합일을 대신해 공휴일 지위를 얻은 것이 바로 ‘국군의 날’이다. 6·25전쟁 초반인 1950년 10월1일 우리 군이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고자 제정된 날이다. 1950년 9월 초까지도 낙동강 방어선 안에 갇혀 고전하던 한국군은 미군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지휘 아래 실시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북진의 기회를 얻는다. 그해 10월1일 육군 3사단이 처음으로 강원 양양에서 38선을 넘어 북한 땅으로 진격했다.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 부대가 성난 파도처럼 밀려들면서 1950년 10월19일에는 평양마저 아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비록 중공군의 개입으로 북녂 영토 수복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으나,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한 지역에서 어깨 겯고 싸운 경험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24일 제79주년 유엔의 날을 맞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유엔 참전 기념행사가 열렸다. 6·25전쟁 당시 미국 등 16개국이 한국에 전투 병력을 보내 북한군과 싸웠다. 또 독일 등 6개국이 의료진을 파견해 다치거나 병든 한국군 장병과 민간인들을 치료했다. 2만7000명 가까운 군인을 파병해 그중 500명 이상이 전사한 캐나다의 육군 중장인 데릭 맥컬리 유엔군사령부 부사령관이 축사를 했다. 전쟁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미래 세대에게 유엔 참전국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의 정신이 전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지원 덕분에 살아남은 한국이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지 깊이 고민하는 계기로 작용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