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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중증 정신질환 자식 못 돌봤다는 죄책감에… 피해자 64% ‘선처’ 탄원 [심층기획-망상, 가족을 삼키다]

출소 이후 자식 원망 두렵다는 이유도
누적된 돌봄 부담에 지친 가족들 많아
“사회서 영구 격리” 엄벌 요구하기도

“피해자는 수사 단계에서부터 처벌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부모로서 아픈 피고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점을 자책하며 피고인이 치료받아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2019년 망상 증상을 보이며 친어머니를 살해하려 한 가해자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한 판결문 일부)

조현병. 게티이미지뱅크

27일 세계일보가 지난 10년간(2014~2023년) 발생한 정신질환자의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판결문 211건을 분석한 결과, 피해자 측이 재판부에 선처탄원서를 제출한 경우는 136건이다. 211건 중 64.45%에 달하는 수치다. 피고인 변호사 16명에게서 피해자가 선처를 탄원하는 이유를 들어본 결과, 피해자들은 양가적인 ‘감정’ 사이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첫째는 자식을 교도소에 보낼 순 없다는 ‘죄책감’이다. 흉기에 찔린 뒤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서도 아들이 처벌받지 않게 하기 위해 구급대와 의료진 등에게 “내가 스스로 찔렀다”고 말한 40대 어머니 사례가 대표적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무관심과 잘못된 교육방식 탓에 사건이 발생했다면서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는 의사를 거듭 표한 사례도 있었다.

 

둘째는 자식에게 원망을 사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국선변호사는 “진심 어린 선처 탄원도 있지만, 피고인이 나중에 문제 삼을까 봐 무서워서 해주기도 한다”며 “재판에서는 피고인이 들으니 말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자식이) 형기를 마친 뒤가 걱정’이라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 가족은 엄벌을 탄원하기도 했다.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해달라”고 요구하는 식이다. 2015년 서울에서 열린 존속살해미수 재판에서 40대 아버지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식에 대해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어 더 이상 가족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국가기관에서 보호하면서 치료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 같은 탄원의 이면에는 오랜 돌봄으로 누적된 갈등이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찌른 아들을 엄벌해달라고 요청한 사건에서 피고인 측 이용민 변호사는 “이전에도 피고인이 아버지를 폭행하는 사건이 여러 번 반복됐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선처를 바라셨다”며 “이번엔 살인미수까지 가니까 ‘내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게 된 것으로 보였다”고 전했다.

 

선처 탄원과 엄벌 탄원 모두 결국 정신질환자를 홀로 책임져온 가족들이 갖는 부담감의 발로다.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존속살해 사건을 다수 맡은 전용현 변호사는 “조현병 등 정신질환은 관리할 수는 있어도 쉽게 치료되지는 않는 질환”이라며 “처음엔 가족들이 돌보다가도 나중엔 지쳐 나가떨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정신질환자의 치료관리를 가족에게만 맡겨둔다면 비극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아이 손에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치만 어쩌겠어요.”

 

중증 정신질환을 가진 부모들이 한 번쯤 가져본 마음이다. 실제로 부모가 정신질환 자녀의 손에 죽거나 죽을 뻔한 참극이 전국에서 매년 20건 이상 발생한다. 존속살해범이 된 정신질환자 한 명에게 엄한 죗값을 물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세계일보는 8개월간 무엇이 그를 부모를 죽인 범죄자로 만들었는지 추적했다. 최근 10년 치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판결문 823건을 살피고, 정신질환과 관련된 사건의 규모와 특성, 원인을 분석했다. 정신질환이 있는 당사자와 가족, 의료계와 법조계 전문가 등 84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전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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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김나현·윤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