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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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루프트한자에서 겪은 인종차별

독일 베를린에서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직항이 아니었던 터라 뮌헨에서 한 번 경유를 해야 했다. 뮌헨으로 가는 루프트한자 비행기, 미리 배정받은 통로쪽 좌석에 앉았다.

곧바로 다소 시끄러운 독일인 중년 일행이 들어왔다. 일행 중 한 여성이 내 옆자리, 즉 가운데 자리였다. 그녀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내게 말을 걸었다. 자기와 자리를 바꿔 달란다. 직설적이고 당당한 요구에 순간 당황했지만, 나 역시 가운데 자리를 좋아하지 않기에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김범수 산업부 기자

그러자 그 여성은 갑자기 자신의 일행들에게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독일어로 말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순 없었지만, 자신은 가운데 자리에 앉으면 공황발작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내 그들은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공황발작이 일어나면 책임질 거냐, 같은 내용이었다.

상대방이 너무나 당당하게 화를 내면 잘못이 없어도 움츠러들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부탁을 할 거면, 먼저 예의를 갖춰라.”

그들은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닌지, 내 말을 듣자마자 거의 악을 쓰다시피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한 승무원이 근처로 왔다. 하지만 승무원은 중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상황의 모든 책임을 내게 돌리고 있었다.

결국 자리를 바꿔 주는 것으로 조율됐지만, 찝찝한 일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남성이 통로에서 다짜고짜 어깨로 나를 가격했다. 쉽게 말해 ‘어깨빵’을 당한 것이었다. 그의 행동에 항의하자 그는 ‘냄새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감싸쥐었다.

해외에 오래 있다 보면, 단순히 예의없는 것과 인종차별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처음부터 아는 게 아니다. 일종의 불가항력적인 데이터다. 나도 처음에는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이해 못하고 멋쩍게 웃던 적도 있다. 그렇게 한번 두번 당하다 보면 무례함과 인종차별의 선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막무가내로 비행기 좌석을 바꿔 달라며 언성을 높인 건 무례함이다. 냄새가 난다는 듯 코를 과장되게 쥐어잡는 것은 인종차별이다.

비행기에서 겪었던 일들을 정리해 루프트한자에 정식으로 ‘컴플레인’을 걸었다. 일방적으로 동조한 승무원에 대한 항의도 포함했다. 답변은 하루 만에 왔다. 항공사는 요청하지도 않은 보상금 50유로를 제시했다. 불쾌한 돈이었다. 나는 돈은 필요 없고, 이번 일을 기록에 남기길 원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 답변은 가관이었다. 사건을 조사했지만 어떠한 신고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더 이상의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보통 항공사는 승무원이 물을 쏟아도 서비스 개선 차원에서 기록을 남긴다. 루프트한자도 예외는 아니다. 승무원이 고의로 신고를 누락한 건지, 루프트한자가 묵살한 건지는 승객으로선 알 수 없다.

베를린에서 머무를 때 밤마다 산책을 나갔다. 숙소 근처에는 1940년대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를 당한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 있었다. 2710개의 추모비는 밤에 특히 엄숙했고, 때론 숭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위선이 먼저 떠오르는 건 분명 아쉽다.


김범수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