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린이’(달리기 초보)로 전전하다 얼마 전 처음 단축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야근과 술자리로 지친 몸에 연습도 부족해 초반은 매우 힘에 부쳤다. 호흡 조절도 여의치 않고, 나를 추월하는 경쟁자에 신경이 거슬려 페이스를 잃기도 했다. 연습 때보다 속도를 늦춰 가까스로 반환점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잠깐 숨 돌리며 물 한 모금 마시자 상황이 반전됐다. 몸이 풀려선지 한결 편해졌고, ‘여기까지 왔는데 완주해야지’라는 의지도 솟았다. ‘반환점 효과’ 덕에 후반전은 앞선 타깃을 경쟁자로 삼고 달리며 기록도 제법 줄였다.
정치도 마라톤레이스처럼 반환점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불행히도 한국 역대 대통령들에게 임기 반환점은 레임덕의 서막이었다.
임기 5년의 대통령들은 2년6개월 무렵 집권 3년차 증후군에 시달렸다.
각종 권력형 게이트로 몸살을 앓았고, 당·청 내홍으로 국정난맥이 빚어졌다. 쇄신은커녕 민심 이반만 가중됐다. 눈치 빠른 관료들은 현 권력과 손절하며 레임덕을 가속화시켰다. 대통령 지지도는 하염없이 떨어지고 선거마다 여권은 참패였다. 기세 좋게 휘날리던 개혁의 깃발은 찌들어 흉물 신세가 돼버렸다. 권력의 구심력과 원심력이 맞서다 결국 원심력이 이긴 순간으로 후대에 기록되곤 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역대 대통령들의 3년차 증후군을 똑같이 겪고 있다. 증세는 더 심해 보인다. 반환점 기준 지지율은 20%로 역대급 최저 수준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국면에서 정치적으로 분수령이 된 시점 중 하나가 20%가 깨진 2016년 10월 4주차(갤럽 17%)다. 20%가 무너지면 핵심지지층마저 숨어 버린다. 여기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조기 레임덕이 가시화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윤 대통령은 29일 4대 개혁(의료·연금·노동·교육개혁) 추진 의지를 재천명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올해) 남은 두 달 정부는 무엇보다 4대 개혁 과제 추진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며 “사회 전반의 구조개혁 없이는 민생도 없고 국가의 미래도 없다”고 말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만 메시지에 힘이 실리지 못한다. 돌을 맞더라도 역사를 보고 일을 하면서 ‘윤석열의 레거시’를 만들겠다는 구상이겠지만 현실성이 높지 않다. 권력의 정점인 임기 초반에 했어도 달성이 여의치 않았을 난제들을 20% 이하 지지율로 돌파하겠다는 것은 난센스다. 더글러스 리버스 스탠퍼드대 교수와 낸시 로즈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1%포인트 오를 때마다 의회에서 대통령이 제안한 법안이 통과될 확률은 1%포인트씩 높아진다고 한다. 결국 반대로 지지율이 추락하면 법안 통과 확률은 미미해지는 셈이다. 더욱이 지금은 초유의 여소야대 상황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용산과 여권의 인식은 여론과 동떨어져 보인다. 국회 도움이 절실하건만 윤 대통령은 다음 달 4일로 예정된 2025년도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을 직접 안 할 수 있다고 한다. 여의도로 눈길을 돌리면 친한·친윤 간 당 내홍은 점입가경이다. 김건희 여사의 의혹이 연일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블랙홀처럼 이슈를 삼키는데도 용산이나 여권은 감히(?)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권 골수 지지자들 사이에 박근혜정부 당시 국정농단의 데자뷔(기시감)를 떠올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은 반환점을 맞아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의 키워드나 핵심 개혁 과제를 화두로 빼 들곤 했다. 전면 개각을 통한 인적 쇄신, 개헌을 통한 정치개혁, 남북관계 진전 등 굵직한 이슈가 기자회견이나 담화문 형식으로 나왔다. 정권을 가리지 않고 소통 강화는 단골메뉴처럼 등장했다.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도 있고, 되레 패착이 된 방안도 있었다. 아마도 용산은 지금 이 가운데 성공한 것을 벤치마킹하고 실패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으며 여러 쇄신 방안을 물색 중일 것 같다. 그렇지만 현 정부는 역대 정부의 반환점과는 결이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결국 국민 눈높이에 맞는 김 여사 리스크에 대한 진정성 있는 해법을 찾을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kt 위즈는 작년과 올해 시즌 초반 꼴찌에서 반환점 기간을 거치며 포스트시즌까지 가는 저력을 보였다. 윤석열정부가 KT의 마법을 재연할지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결단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