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찰리의 연감/찰리 멍거/ 피터 코프먼 엮음/ 김태훈 옮김/ 김영사/ 3만3000원
‘경제적 독립’을 위해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변호사와 투자가로 활발하게 뛰던 찰리 멍거는 아버지가 세상에 떠나면서 고향인 중부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로 잠시 돌아가서 유산을 관리해야 했다. 이때 그의 귀향을 환영하기 위해서 그의 친구들과 그가 스승으로 모신 분의 자녀들이 디너파티를 준비했다.
이 파티에 그의 친구들과 스승의 자녀들은 물론, 자신보다 몇 살 어린 워런 버핏이라는 젊은 투자가가 참여했다. 멍거와 버핏 두 사람은 이날 파티에서 서로의 생각이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은 너무나 잘 맞았다.
두 사람은 이후 전화와 때로는 아홉 장에 이르는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워런은 투자나 인수를 할 때 찰리 멍거의 법무법인을 이용하는 등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멍거는 몇 년 뒤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투자회사를 차려서 투자업에 뛰어들었다. 둘은 이때에도 서로 연락하면서 아이디어를 나누고 공동 투자를 구상했다. 각자의 투자 경험을 통해서 더 이상 투자자를 위한 직접 자금을 운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대신 지주사를 통한 주식 보유로 자산을 구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는 곧 망해가던 섬유공장 버크셔 해서웨이를 인수한 버핏으로부터 동업 제안을 받았고, 1978년 버크셔 해서웨이 이사로 합류해 이사회 부의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버핏과 함께 가치투자의 신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워싱턴 포스트나 코카콜라 등 저평가된 기업을 찾아낸 다음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거나 바로 인수하는 방법으로 놀라운 실적을 기록했다. 멍거의 분석과 조언은 버핏에게 큰 힘이 됐다고 버핏은 회고했다. “찰리는 어떤 거래든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문제가 될 만한 약점을 60초 안에 모두 포착한다. 동업자로서 완벽하다.”
두 사람은 전략적인 동업과 우정이 큰 시너지를 내면서 버크셔 해서웨이를 지난 9월 현재 시가총액 1조달러가 넘는 지주회사 겸 종합 투자회사로 성장시켰다. 그는 오랫동안 최고의 동업자이자 친구로 버핏의 곁을 지키다가 지난해 11월 캘리포니아주의 병원에서 노환으로 저세상으로 떠났다. 향년 99세.
멍거의 오랜 친구이자 전기커넥터 기업 회장인 저자는 ‘현자들의 현자’ ‘가치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단 한 명의 동업자’로 불리는 그의 연설문과 에세이를 바탕으로 멍거의 인생 스토리와 투자 전략, 강연록을 정리했다. 책은 멍거가 남긴 유일한 저작으로 평가돼 왔다.
앞부분에 소개한 것처럼, 책은 오마하에서 소박하게 살던 소년 시절부터 엄청난 재정적 성공을 거두기까지 멍거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로 문을 연다. 이어서 평생의 동업자인 버핏과 멍거 자녀들의 회고, 그의 투자법과 원칙, 그의 강연 가운데 가장 뛰어난 11개와 청중과의 질의응답 등이 담겨 있다.
멍거에 대해 아들 찰리 멍거 주니어가 들려준 인상적인 에피소드 하나. 아들이 열다섯 살 무렵, 가족 휴가 동안 자동차를 빌려서 스키를 타러 선밸리로 떠났다가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눈 쌓인 도로를 달렸다. 비행기를 타려면 시간이 촉박했고 기름 역시 절반이나 남아 있었지만, 아버지 멍거는 빨간색 지프에 기름을 넣으려고 무려 10분 정도 길을 돌아갔다고 한다. 아들은 기름이 충분한데도 왜 그러느냐고 묻자, 멍거가 말했다. “다른 사람의 차를 빌렸을 때는 항상 기름을 가득 채워서 돌려줘야 해.” 아들은 이때의 경험을 통해서 좋은 친구를 얻고 친구 사이를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고.
멍거는 조찬 모임이나 졸업식, 동창회, 대학 강의실에서 흥미로운 사례와 특유의 유머를 통해서 투자에 관한 통찰뿐 아니라 인생과 배움, 의사결정 등에 대한 지혜를 설파했다.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다양한 학문들의 핵심 원칙에 기반한 ‘복수 사고 모형’을 통해서 투자와 인생을 바라보고 대응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개별적인 팩트만 기억했다가 다시 떠올리려고 하면 하나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론이라는 틀로 묶이지 않는 팩트는 활용 가능한 형태를 갖추지 못합니다. 머릿속에 모형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복수 사고 모형을 구체적인 투자의 장에 적용, 기업 재무정보를 개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 기업에 속한 좀 더 크고 통합적인 생태계를 포괄적으로 분석하려 했다. “그는 기업을 재무정보를 인위적 개별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 대신 투자 후보 기업의 상태와 그 기업이 속한 좀 더 크고 통합적인 생태계를 포괄적으로 분석한다.” 그래서 자기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분야와 종목을 신중하게 파악하고 선택한 뒤, 큰돈을 투자했다.
멍거는 주식시장이 대체로 효율적이고 이성적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효율적이거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극단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을 ‘또라이’라고 불렀고, 주식시장을 ‘매일 찾아오는 조울증 환자’로 여겼다. 그는 이에 ‘투 트랙 분석’을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먼저 이해관계를 진정으로 좌우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고려합니다. 그런 다음 무의식적 차원에서, 뇌가 우리 판단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살핍니다.”
특히 그의 마지막 강의인 ‘인간적 오판의 심리학’은 멍거식 관점의 정수가 담겨 있다는 평가다. 그는 인간이란 우연한 상황에 쉽게 속거나 그저 관행을 따르는 데다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실수를 한다며 25개의 심리적 경향을 소개한다. 보상/처벌 과잉 반응, 미움/혐오 경향, 칸트식 공정성 경향, 과잉 자진 존중 경향, 과잉 낙관 경향….
책은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이 가장 신뢰하고 유일한 동업자로 인정해온 찰리 멍거의 투자 원칙은 물론 그의 삶의 지혜와 통찰을 엿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