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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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진의시네마포커스] 새로운 모성의 출현

‘범죄 도시 2, 3, 4’ ‘파묘’ ‘서울의 봄’의 공통점은 2020년 이후 코로나 팬데믹이 촉발한 영화 산업의 극단적 불황 속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 영화라는 점이다. ‘범죄 도시’ 시리즈를 하나로 묶는다면 사실상 지난 5년간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는 3편에 불과하다. 시쳇말로 지금 한국 영화계는 죽을 쑤는 중이다. 언제나 가난한 독립영화계였지만 불황의 그늘은 이 작은 동네도 피해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흥미로운 경향은 꿈틀거린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젊은 감독들의 단편영화에는 고아 의식 혹은 부친 살해 욕망의 모티브가 빈번히 깔려 있었다. 가족과 국가를 부양하고 지배하는 가부장들은 폭력적이기 일쑤였고 그 아버지의 힘과 권위에 짓눌린 자식은 어머니와 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을 무기력하게 감내해야 했다. 그런 아들의 서사는 종종 사적인 고통과 공적인 역사의 폭력을 연결하는 서사의 관습으로 나타났고 당시 전주국제영화제는 이러한 한국 단편영화의 경향을 분석하는 비평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 무렵 젊은 감독들의 출현과 아들의 시점에서 재현된 부친 살해 욕망의 서사와 비교하면 근래 독립영화는 여성 감독의 등장과 함께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두드러진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주류 산업의 견고한 유리천장에 비교하면 독립영화는 여성들의 진입 장벽이 낮다지만 이곳에도 역시 장벽은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이다. 독립영화란 문화적 다양성의 뿌리를 내리는 수작업이며 그렇게 뿌려진 다양성의 씨앗은 주류 영화계의 다양성과 건강한 생태계 형성에도 기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두드러진 것은 ‘새로운 엄마’의 등장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폭력에 무기력한 전형적인 엄마를 대신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눈 감지 않는 여성, 모성의 등장. 올해 주목받은 대표적인 독립영화들(‘그녀에게’ ‘딸에 대하여’ ‘정순’ ‘두 사람을 위한 식탁’ ‘다섯번째 방’ ‘장손’ 등)은 모두 이러한 이슈와 직간적접인 관련을 맺는다. 특히 다양한 엄마 연기로 ‘국민 엄마’라는 애칭을 얻은 오민애 배우의 변화는 놀랍다. 얼마 전 ‘한국이 싫어서’의 상영 후 마련된 감독과의 대화에서 오민애 배우는 여배우로서는 매우 드물게 화장을 안한 민낯으로 참석했다. 전통적인 여성에 가까웠던 자신이 독립영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는 그녀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언행은 일종의 탈코르셋이었다. 새로운 엄마를 열연하는 그녀의 모습은 최근 개봉작 ‘딸에 대하여’에서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데 그저 ‘엄마’였던 그녀가 이력서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갖고서 얼마든지 딸을 사랑하는 엄마와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준다. 한국 독립영화에 앞으로 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할 거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순간이다.


맹수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