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메모리 사업을) 분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파운드리) 사업의 성장을 갈망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달 7일(현지시간) 필리핀 방문 중에 로이터통신을 만나 이같이 밝혔다. 한때 ‘반도체 왕국’이라 불렸던 인텔이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사업 운영난으로 분사를 결정한 가운데, 이 회장은 직접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시스템LSI(반도체 설계) 사업에 계속 투자하겠단 의지를 밝힌 것이다.
앞서 이 회장은 2030년까지 비메모리 사업에 총 171조원을 투자해 글로벌 1위로 도약한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선포한 바 있다.
필리핀서 전한 이 회장의 의지는 한 달도 채 안 돼 ‘전략 변경’으로 갈음되는 모양새다.
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달 31일 3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메모리 우선’ 전략을 내비쳤다. 기존 턴키(일괄 수주) 강점을 내세우기보단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수익성이 높은 인공지능(AI) 메모리에 집중해 업계 전반에 퍼진 ‘삼성 위기론’을 돌파하겠다는 노림수다.
턴키는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의 자부심이자 핵심 전략이었다. 메모리 생산과 반도체 설계, 파운드리를 모두 한 회사에서 담당하는 세계 유일의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 고객 입장에선 삼성전자에 맡기면 설계 지원부터 패키징까지 원스톱 서비스로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분야 간 시너지로 보다 높은 전문성을 기대할 수 있다.
삼성전자가 턴키 전략에서 일보 후퇴한 배경엔 고객사의 기술 유출 우려, 지속되는 비메모리 사업 적자 등이 자리한다.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 입장에선 삼성전자 파운드리에 반도체 제작을 맡기면 자사 기술이 같은 시장 경쟁자인 삼성전자 시스템LSI에 흘러들어 갈 수 있다는 의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시스템LSI는 이번 3분기에만 1조원 중후반대의 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지난 30년간 글로벌 메모리 1위를 수성한 ‘초격차 기술력’을 회복해 수익성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메모리 중심 전략의 일환으로 ‘적과의 동침’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6세대 HBM인 HBM4부터 파운드리 최대 경쟁자이자 절대 강자인 대만 TSMC와 손잡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HBM4는 이전 세대와 달리 ‘커스텀 HBM’으로, 고객사마다 서로 다른 요구를 반영한 HBM을 제작해야 하므로 공정 난도가 급격하게 올라가는데 TSMC는 이미 차세대 패키징 기술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 입지를 구축한 상태다.
지난 9월 댄 코흐파차린 TSMC 에코시스템 및 동맹관리 헤드가 “삼성전자와 HBM을 공동 개발 중”이라고 밝혔고,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이번 실적발표에서 “(HBM4 제조 관련) 파운드리 파트너 선정은 고객 요구를 우선으로 내·외부 관계없이 유연하게 대응할 계획”이라고 말해 양사 협력이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가 읽혔다.
이르면 이달 말로 예상되는 연말 인사와 대대적인 조직 개편도 메모리 초격차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5월 취임해 메모리 초격차 전략을 총지휘 중인 전영현 부회장(DS부문장)은 취임 한 달여 만에 HBM 개발팀을 신설하며 삼성전자 전체 실적의 절반 이상을 견인해온 메모리부터 살리려는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전 부회장은 지난 1일엔 취임 뒤 처음으로 DS 소속 임원 토론회를 열고 본격적인 쇄신 방안을 논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