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과 러-우전쟁에 대한 관여 수준을 서둘러 결정하기보다는 미국 대선 후 러-우전쟁 전개 양상과 북한군의 동향을 면밀하게 관찰하며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 국가정보원 유관 국책연구기관에서도 나왔다. 국정원이 북한 파병 관련 정보를 앞장서 공개하며 미국 정부와 엇박자를 내고, 정부가 우크라이나 지원 강화를 시사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지적이라 특히 주목된다.
국가안보략연구원의 김성배 안보전략연구실 수석연구위원은 8일 이슈브리프 ‘북한군 러-우전쟁 파병의 지정학적 의미 분석’에서 “러-우 전쟁 파병 배경에 대해 러시아의 절박한 군사적 수요와 북한이 얻게 될 군사기술이나 급여 등 반대급부 차원에서 주로 접근이 이뤄지고 있는데, 외교사적 차원에서 큰 그림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은 러-우 전쟁이 언제든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암묵적 시사를 통해 미국과 서방에 조기 종전을 압박하는데 주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모스크바-평양 추축(Axis·세계2차대전에서 연합군에 대항한 연합체) 형성을 통해 유라시아와 동아시아·한반도의 지정학적 연계를 강화해 국제정치적 영향력과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푸틴과 김정은의 그레이트게임 차원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고 했다.
김 수석은 “북한군 파병은 기존 진영대립에 더해 유라시아 하트랜드(유라시아 북부 러시아 일대)와 동아시아 림랜드(유라시아 대륙 가장자리)를 무대로한 지정학 게임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트랜드인 러시아는 림랜드 중국과 연합하고 북한까지 포섭해 해양세력과 경쟁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고, 해양세력 미국은 림랜드와 하트랜드의 분열을 유도하거나 하트랜드와 연합해 림랜드를 고립시키는 선택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림랜드 주도국 중국은 하트랜드나 해양세력과 과도한 갈등을 피하고 하트랜드와 해양세력이 서로 대립하는 구도를 선호할 것이고, 림랜드의 일원인 한반도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이러한 지정학 게임에 과도하게 연루되는 것을 피해야 하는데 북한은 아예 지정학 게임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모험을 선택한 것”이라고 봤다. 이어 “향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추이는 진영간 대립과 지정학 게임이 동시에 작용하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중국, 러시아, 북한 3자 관계는 재편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중국은 그간 러-우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대중압박이 러시아로 분산되는 효과를 누렸지만 북한군 파병으로 유라시아와 역내 정세가 밀접 연동돼 더이상 반사효과를 즐길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됐다”며 “(북 파병은) 중·러·북 밀착의 이완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는 “과도한 중·러·북 밀착이 중국엔 부담으로 작용하는 국면”이라며 “러·북 초밀착으로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넘어서 러-우전쟁 파장이 역내 안보환경 악화로 이어지는 것은 중국으로서도 방치할 수만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중국의 선택지로 △한·중관계 개선과 대북압박을 통해 러·북 초밀착을 견제 △중·북관계 복원을 통해 역내 영향력 경쟁 △방관자적 입장에서 현상유지에 치중을 꼽았다.
김 수석은 “안보 리스크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정교한 정세 관리가 요구된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과 러-우 전쟁에 대한 관여 수준을 미리 서둘러 결정하기보다는, 미 대선 이후 러-우전쟁의 전개 양상과 북한군의 동향을 면밀하게 관찰하며 차분히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정부나 나토와의 협력도 필요하지만, 어디까지나 한·미동맹 차원에서의 조율이 최우선 순위”라고 강조했다.
또한 중·러·북 연대에 긴장 요인이 발생한 것에 착안, 중·러·북 밀착을 차단하고 이격하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중국이 러-우 전쟁의 정치적 해결을 강조하며 북한군 파병에 불편한 반응을 보이고, 한국인에 대한 단기 관광비자를 면제하는 등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며 “향후 중국이 러·북 초밀착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중·북관계 복원이 아니라 한·중관계 개선과 대북 압박을 선택하도록 중국과의 전략적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한·러관계와 관련해서도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트럼프 후보 승리로) 러-우전쟁의 종전 협상이 개시될 경우에는 러·북동맹의 전략적 가치가 저하되고, 한·러관계도 개선될 소지가 있는 만큼 한·러관계의 문을 닫아 둘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김 수석은 “북한이 사실상 이중 핵우산(북핵·러시아와의 동맹)을 확보한 만큼, 기존의 대북 확장억제 중심의 안보전략은 재조정이나 보완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미동맹의 확장억제와 함께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할 수 있는 자체 국방력 강화가 절실하며, 핵잠수함의 도입이나 잠재적 핵능력 확보 등 안보 신뢰도 제고를 위한 다양한 옵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또 “해외파병이라는 북한의 모험주의적 결정이 북한 체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중장기적 관점에서 남북관계를 관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며 “북한이 내심 노리는 군사적 맞대응보다는 대남정책을 재전환하도록 지속 촉구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