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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유령의 시간』 김이정 “이 소설이 다시 필요해진 시대에 화도 나고 참담”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소설가 김이정 /2024.10.06 허정호 선임기자

내가 이 소설을 쓰려고 작가가 됐는데. 선뜻 쓰지 못하고 계속 미뤄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편이 파산을 했다. 살던 집은 물론 자동차까지,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야 했다. 결혼 초 아이를 낳고 느꼈던 ‘내 인생이 끝났다’는 위기감보다 비교할 수 없는 절박감이 몰려왔다. 내가 이것을 못 쓰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등단 이후 소설가 김이정은 개인의 상처에 집중해왔다. 그때그때 절실했지만, 아버지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설에 자신감도 붙고 세상을 보는 눈도 좀 깊어지면 쓰려고 미루고 있었다. 정말 잘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 덴노가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 선언을 했고, 이를 라디오로 듣고 일장기 위에 그린 태극기를 들고서 집 밖으로 나갔다. 친구를 함께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때 평소 거만하게 굴던 일본 순사가 친절하게 오토바이의 사이드카에 태워주었다.

 

해방을 맞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자서전을, 아버지가 갑자기 1975년 광복절 날부터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가족을 다 불러서 자서전의 시작을 보여줬다. 문청기질이 있는 아버지는 쓰는 것을 좋아했다. 노트에 만년필로 에세이와 일기를 비롯해 시도 쓰셨는데, 심지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이야기도 썼다. 그런 그가 갑자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아버지는 한 달 열흘 남짓 자서전을 쓰다가 쓰러지셨다. 그해 장례식에서 친척과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렸다. “무슨 법이 발령돼 가지고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셨다고 하드라고.”

 

아버지의 죽음에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드물게 아버지를 좋아하는 딸이던 김이정이 쓰다만 자서전을 읽어보니 아버지의 청년기 초입까지 쓰여 있었다. 누런 원고지에 쓴 자서전은 22장 분량. 또 다른 노트를 살펴보니 사회안전법 전문을 오려서 색연필로 밑줄을 그은 게 보였다. 아, 이게 원인이었겠구나. 손녀딸처럼 예뻐하던 막내 동생이 죽은 것도 충격이 컸을 것이고.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오빠는 동생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자서전을 완성하겠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생 김이정은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아버지의 자서전을 내가 완성하게 되지 않을까.

 

그는 이때까지 소설을 쓰겠다든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을 뿐이다. 책을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서울에 전학을 온 뒤부터였다. 시민아파트 단지 안의 마을문고에서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명작 전집』,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을 접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아버지가 재미있다고 읽어보라고 한 소설 『러브 스토리』나 러시아 문학전집을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던 그는, 쓰다만 아버지의 자서전을 보며 저 자서전을 내가 완성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를 작가로 만들게 한 순간이 있다면, 아마 그 순간인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된 거죠.”

 

남편이 파산한 2008년 가을, 김이정은 매일 도서관을 나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미루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점차 속도가 붙어 넉달만에 초고를 썼다. 이후에도 한참 원고를 더 들고 있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붙이기도 했다. 여러 차례 퇴고를 반복한 끝에 2015년 『유령의 시간』을 발표했다. 쓰고 싶다고, 아니 쓰게 될 것이라고 예감한 지 40년 만이었다. 작품은 그에게 이듬해 대산문학상을 안겼다.

 

“다 지나고 보니까 그 어려운 시기를 글 쓰는 힘으로 살아남았구나, 소설이 오히려 나를 지켜준 구명 보트였구나, 이런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글쓰기의 힘 같은 것을 아주 절절하게 느꼈던 시절이었지요.”

 

김이정 작가가 최근 분단의 비극 속에서도 인간 존엄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 『유령의 시간』의 개정판(교유서가)을 출간했다. 출간 9년만이다. 소설은 아버지 이섭과 딸 지형의 시각을 교차해 전개하면서 현대사의 격류와 이념 때문에 뒤틀린 개인의 비극을 추적하면서도, 인물에 대한 따뜻한 성찰을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섭은 숙부의 영향으로 사회주의를 내건 북한으로 갔다가 피폐한 현실을 목도하고 다시 남으로 내려오지만, 아내와 자식들은 그를 쫓아서 북으로 가면서 가족의 행로는 엇갈린다. 이후 남쪽에서 재혼해 4남매를 낳도록 전 부인을 호적에서 지우지 못하고 그리움을 속으로만 삭인다.

 

“한때 목숨을 걸었던 신념과 열정에 보기 좋게 배반당한 후, 이섭은 적어도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다시 이룬 가족과 아이들을 위해서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걸었다. 그러나 길은 느닷없이 끊기고 사라져버렸다. 이섭은 다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던 마음의 철심이 툭,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242쪽)

 

그는 연좌제는 물론이고 ‘사상범을 재판 없이 재수감할 수 있다’는 사회안전법의 올가미에 들씌워진 채 조금씩 숨통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해방 30주년을 맞아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인간, 아니 모든 생명은 언젠가 죽는다. 죽으면 흙이 되고 먼지가 되어 이 넓고 넓은 우주 속을 날아다닐 것이다. 인간은 결국 우주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곳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아니 그것이 무엇이든, 뭐라도 있기는 한 걸까. 그저 텅 빈 공간에 불과한 건 아닐까. 인간의 생이여, 헛되고 헛되도다. 하물며 이념과 꿈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지 않는 생은 또 얼마나 헛될 것인가.”(277쪽)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지형은 성장하면서 사회에 눈을 떠간다. 아버지의 가족사 비밀을 알게 된 지형은 아버지가 떠난 지 40년 뒤 아버지가 쓰다만 자서전을 매듭짓는다.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북의 이복 오빠를 만날 기대를 품고 평양에 와서 편지를 쓰는데.

 

김이정은 왜 아버지의 삶이 담긴 소설 『유령의 시간』을 써야 했을까. 전쟁과 분단의 실체를 증언한 이섭이 경험한 유령의 시간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김 작가를 지난달 6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무실에서 만났다.

 

―집필하면서 무엇이 가장 어려웠는지.

 

“아버지가 자서전을 다 쓰지 못하고 돌아가시면서 행적을 구체적으로 몰라서 힘들었다. 월북했다가 다시 왔다는 정도만 알았지, 무슨 일이 있었고 왜 감옥에 다녀왔는지 등 구체적으로 몰랐다. 안타까웠던 것은, 1975년이라는 상황이 굉장히 엄혹해 아버지가 친한 사람에게조차 자신의 행적을 이야기하지 않으셨더라. 어머니조차 잘 몰랐다. 국가기록원이나 재판 기록을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행적을 몰라서 막막했고 망설임의 시간이 길었다. 나중에 책이 나온 뒤에야 셋째 숙부의 자서전을 읽고 아버지가 왜 월북하게 됐는지를 알게 됐다.”

 

―아버지의 이야기여서 오히려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부모를 존경한다는 건, 개인으로선 행복한 일이지만 작가로선 비극이다. 자칫하면 미화의 함정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다. 소설을 쓰면서 책상 앞에 문장 하나를 써 놨다. ‘미화하지 말자’고. 실제보다 더 미화하면 진실도 아닐 뿐더러 소설도 망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보며 자제하면서 썼다. 아버지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절대 자서전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허구의 인물들이 많이 들어가는 ‘소설’이다.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은 아마 사실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어떤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 같다.”

 

―사실과 소설간 차이도 적지 않을 텐데.

 

“많지만 다 이야기하면 재미없다. 사실과 허구가 필요에 따라 섞이기도 한다.”

 

―이번 개정판은 초판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기본 서사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우선 모호하게 썼던 것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쓴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북에서 혁명열사로 돼 있는데, 초판에선 혹시 아버지를 알게 될까 봐 고향 안동을 비롯해 구체적 정보를 감추었는데, 이번에는 적었다. 또 초판에선 현대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아버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그럼에도 인간을 대한 신뢰와 애정에 잃지 않던 사람으로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좀 더 드러나도록 했다.”

 

―한국전쟁이나 7·4 남북 공동성명, 시월 유신 등 현대사의 여러 격류가 등장하는데.

 

“이섭이 죽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무래도 사회안전법이었던 것 같다. 어떤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잠깐 7·4 남북공동성명이 있었지만, 독재가 이어졌으며, 사상을 불온시하는 이데올로기도 기승을 부렸다.(가장 애정이 가는 장면은) 바닷가에서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인간적이나 감정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오죽하면 간첩으로라도 와라. 이런 마음이었겠느냐. 이 장면을 쓰면서 되게 슬퍼서 울었다. 지금도 그 장면은 읽을 때마다 운다.”

 

소설가 김이정 /2024.10.06 허정호 선임기자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진은 그냥 만든 허구의 인물인데, 당시로선 성적 자의식도 있고 주체적인 여자로 그리고 싶었다. 장인인 이진의 아버지는 그 시대에는 거의 보기 드문 자유주의자의 모습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인물이 한명 있으면 해서 만들었고, 딸에 대한 애틋함과 죄책감을 이섭과 공유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장인은 왜 죽을 때까지 사위를 챙겼을까) 자기가 서울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공감대를 이뤘기 때문일 것이다. 장인은 처음부터 이섭을 아들이라고 생각했고 딸을 사랑한 만큼 사위도 예뻐하고 사랑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보니 일기장에 아버지가 묻혀 있던 공원묘지의 팜플렛이 있더라. 장인이 그 공원묘지에 묻혔을 거라고, 엄마가 말해줬다.”

 

―개인주의자 최도 인상적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 인간 안에 숨겨진 여러 면을 나누어 그렸다. 최는 남북관계나 이념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했다. 내 안에도 그런 면이 일부 있고 타인들 역시 여러 가지 모습이 감춰져 있다. 남북문제도 이념이나 사회 체제, 국가문제 등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은 남북관계를 인간의 관점에서 접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군사나 정치, 아니면 경제적인 접근 말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해법이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번 작품은 작가 김이정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여태 6권의 책을 냈지만, 어쩌면 저에게 유일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여섯 권 다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제가 작가가 되려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가장 쓰고 싶었던 이야기였고, 저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있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책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최근 남북 관계가 다시 대결과 반목의 시대로 돌아간 듯한데.

 

“지금의 모습은 소설 속 상황보다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다시 대립과 반목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다. 소설은 1970년대가 배경인데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이 견고한 남북 분단의 장벽에 돌멩이 하나를 던지는 기분으로 책을 펴낸 것 같다. 이 소설이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길 바랐지만, 최근 이 소설이 다시 필요해진 상황에 화도 나고 참담하기도 하다.”

 

아버지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땐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결핍감 없이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그는 기억했다. “늘 가난했지만, 가난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하고 부자라고 생각을 하고 살았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작고하자, 어머니도 돈을 벌어야 했고, 상고를 다니던 오빠도 대입 준비를 그만두고 바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소설을 쓰고 싶은데 이대로는 소설을 쓸 수 없고, 문학이 뭔지도 좀 배워야 되겠는데.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소설을 쓴다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25살에 숭실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2학년부터는 부전공으로 국문과를 선택했고, 국문과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소설은 더 쓰기 어려워졌다. 에세이 같은 것은 썼지만, 소설을 쓰지 못했다. 용기도 없었고.

 

아버지 이야기는커녕 소설도 쓰지 못하고 여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1989년 결혼해 이듬해 아이까지 낳자 어떤 절박감이 밀려들었다. 뭐라도 해봐야 했다. 마침 이때 신문에 실린 한길사의 사설 아카데미 ‘한국문학학교’ 광고를 보고 곧바로 등록했다. “아이 젖 먹이다 말고.”

 

“도대체 어딜 쏘다니고 오느냐.” 첫날 수업을 다녀왔더니, 6개월짜리 아이가 울고 난리였다. 아이를 보던 어머니가 볼멘소리를 냈다. “뭘 한다고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아이를 키우느냐, 소설을 쓰느냐. 다행히 어머니가 육아를 비롯해 여러 일을 도와주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아카데미는 창작 위주가 아닌 개론 위주여서 곧 그만뒀다. 다만 아카데미에서 만난 친구의 소개로 이듬해 송기원 작가가 가르치던 소설 창작반에 합류할 수 있었다. 비로소 소설 습작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야기와 아버지 이야기가 절반씩 들어간 첫 습작품을 썼고, 문화일보에 응모했다가 “덜컥” 당선됐다.

 

1960년 안동에서 태어나서 영주와 제주, 웅천 등을 거쳐 서울에서 성장한 김이정은 1994년 단편소설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가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물속의 사막』, 『유령의 시간』 등을, 소설집 『도둑게』, 『그 남자의 방』, 『네 눈물을 믿지 마』 등을 발표했다.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초기에는 주로 개인들의 상처나 트라우마,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담은 작품을 주로 썼던 것 같다. 『유령의 시간』을 쓴 뒤 시선이 좀 바뀌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나 사할린 강제이주 등 사회나 역사, 전쟁, 폭력 속 개인들의 상처로 시선이 확대됐다.”

 

―소설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이 있다면.

 

“소설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소설에서 인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들이 조금 모자라더라도 인물이 살아있으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얼마나 해내느냐, 인물의 진심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때론 인물에 감정 이입을 위해서 기다리는 시간들도 필요하다. 테크닉이 좀 부족하더라도 인물에 대해 진실되게 쓰고 싶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플롯을 잘 짜지도 못하고 짜는 것도 싫어한다. 인물을 따라서, 인물의 감정과 심리를 따라서 쓴다. 인물이 앞서고 내가 따라간다는 느낌으로 쓸 때가 가장 잘 써질 때이다. 『유령의 시간』의 경우 핍진한 서사가 워낙 많았지만 서사를 죽이면서까지 인물을 좀더 전달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인물이 갖고 있는 감정이나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차기작 계획은 어떤가.

 

“자서전과 딸을 위한 여행기 「만유록」을 쓰기도 한, 이른바 ‘이르쿠츠파’로 불리는 초기 공산당 운동을 펼친 김응섭과, 일제 덴노가 사는 곳에 폭탄을 던졌던 의열단 김지섭과,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역임한 김재봉 등 좌파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다룬 작품을 쓰려고 한다. 숙제를 다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새 숙제가 갑자기 나타났다(웃음).”

 

마치 고구마 줄기처럼 하나를 물으면 연결된 이야기까지 넉넉하게 풀어주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미 수많은 여정을 마친 누이처럼 들뜨지도 않았고, 몇 개의 꿈이 아직 남아 있다는 듯 가라앉지도 않았다. 손은 눈 끝을 자주 만졌고, 모처럼 귀걸이를 찼는지 목걸이도 자주 만지는 게 인상에 남아 있다.

 

평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고 했다. 새벽 두 시쯤 잠을 자고, 다음날 오전 열시 반쯤 일어나며, 약간의 스트레칭을 한 뒤 낮 열두 시에서 오후 한시 사이에 밥을 먹고, 오후 서너 시쯤 도서관을 간다. 창작실이나 레지던스에 들어갈 때도 있고. 밤 열 시쯤 도서관에서 귀가하고, 어머니와 이야기도 하고 책도 읽다가, 다시 어둠의 보금자리로. 꿈나라에선 가끔씩 공원을 산책할 것이고, 여행도 자주 갈 것이며, 아주 가끔은 그리운 이에게 편지도⋯.

 

“아버지는 평생 당신들을 그리워했습니다. 그것만은 꼭 알아주십시오. 아버지는 단 한순간도 당신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당신들을 포기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당신들이 그립습니다. 당신들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아니 그 훨씬 전부터 저는 당신들이 보고 싶었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비록 오늘은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당신들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288쪽)


김용출 선임기자, 사진=허정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