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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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맨스였을까 트라우마였을까… 김정은·트럼프 앞으로 행보는

‘트럼프의 귀환’이 전 세계에 타전됐지만 북한의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 미 대선이 이틀 지난 8일까지도 북한 매체들은 대선 소식 자체를 일절 싣지 않고 있다. 과거 북한 매체가 미 대선 소식을 수일 후 공개했던 것을 고려하면 별일 아니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 지도자 최초로 미국 대통령과 3번이나 회담을 하고 친분을 쌓았던 사실을 고려하면 “당선 축하 전문이라도 나오지 않겠느냐”는 세간의 관심도 일리가 있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당선인이 ‘구면’인 건 맞다. 다만 그 인연이 여전히 ‘브로맨스’일지 ‘트라우마’로 남았을지 외부에선 아직 알기 어렵다. 북한이 당장 중요한 함의가 있는 반응을 보이거나 노선변화를 하기보다는 탐색전을 가질 거란 관측도 나온다.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11월 6일 오후 트럼프 후보의 대통령 당선 연설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뉴스1

◆2025년 말까지, 바꾸기 어려운 ‘국방 강화 노선’

 

일단 북한 내부적으로는 2025년 말까지 국방력 강화 계획이 서 있는 상태다.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2020년 11월 트럼프 재선 실패 이후 북한은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향후 5년 향후 노선을 천명했다. 기존의 ‘경제 집중 노선’에서 ‘국방력 강화 노선’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때 ‘국방공업발전 및 무기체계 개발 5개년 계획’을 선포하고 ‘핵·미사일 고도화’의 길로 들어섰다. 첫 핵폐기 협상 결렬을 경험한 김 위원장이 핵무력을 아예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겠다고 돌아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2021년 3월엔 외무성 담화를 내고 바이든 신 행정부의 비공개 대화접촉에 거부한다는 입장도 공개했다. 이후 핵·미사일 고도화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북한이 내세운 5대 국방과업(①극초음속 무기 개발 ②초대형 핵탄두 생산 ③1만5000㎞ 사정권 내 명중률 제고 ④수중 및 지상 고체엔진 ICBM ⑤핵잠수함과 수중발사 핵전략무기 보유)이 완성돼가는 속도는 국내 전문가들도 “예상보다 빠르다”고 할 정도였다.

 

이 노선은 북한 노동당이 2025년 12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열어 성과를 결산할 때까지 변화할 가능성이 작다. 바이든 신정부 출범과 비슷한 시기에 정해진 이 노선은 외교적으로는 철저하고 적극적인 ‘반미연대’ 구축이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1월 4일 수해복구 현장을 현지지도 하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했다. 평안북도와 자강도 일대 홍수로 1000명이 사망했다는 관측까지 국내에서 제기된 재난 현장이다. 공사 현장에 ‘난관 극복’이란 대형 표어가 눈에 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북한이 처한 대외환경도 2018년 대화로 나오기 직전 상황과 지금은 큰 차이가 있다. 2018년 대화로 나오기 전, 북한은 중국, 러시아까지 공조하는 국제사회 압박을 받고 있었다. 고립무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은 코로나19로 인한 3년간의 ‘셀프 봉쇄’까지 버텨낸 자신감, 러시아와의 동맹을 넘어 혈맹으로 진화,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가 러시아 주도로 붕괴하는 과정에 있다. 서둘러 대미 담판에 나설 이유가 없다.

 

다만 10월 31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9형을 발사했을 때 북한이 “최종완결판”이라고 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완결”됐다는 건 추가 시험발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어서다. 5대 국방과업이 빠르게 추진돼왔고, 정치적 판단에 따라 ‘조기달성’ 선언을 못 할 체제도 아니란 점도 떠올려 볼 수 있다. 2025년 말까지 기존 노선을 마냥 고수하지만은 않을 수 있단 거다.

 

◆친서 외교 재개될까?

 

큰 변수로 주목을 받는 건 역시나 트럼프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이다. 근래 정부 당국자들과 전문가들은 “트럼프-김정은이 주고받았던 편지부터 다시 봐야 할 것 같다”며 2018-2019년의 친서외교를 복기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1기때 두 정상은 북·미관계가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 친서 수십통을 주고받았다. 이 가운데 미국 저널리스트 밥 우드워드가 입수해 공개한 2018년 4월 1일부터 2019년 8월 5일까지 오간 친서 27통 전문을 보면, ‘하노이 노딜’이라는 충격적 결말 이후에도 둘은 서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김 위원장은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을 “걸출한 지도자”, “각하와 각별한 관계는 영광” 등으로 표현했고 트럼프도 “훌륭한 추억”, “독특한 우정” 등의 수사를 동원해 예우했다.

 

친서외교는 두 정상의 상징적 수단이었다. 정상 간, 국가 간 축전이니 위로전문이니 하는 것을 주고받는 것은 지극히 의례적 외교행위로도 볼 수 있지만, ‘톱다운’ 방식, ‘정상 간 담판’으로 30년 북핵 난제의 해결을 보려 했던 두 당사자에게는 정반대 의미였다. 대외에 내놓은 강경 메시지와 달리 속내를 전달하는 수단이었고, 협상 교착상태에서 ‘돌파구’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해결사’, ‘딜 메이커’를 지향하는 성향의 트럼프 대통령은 친서가 올 때마다 “아름다운 편지”등으로 표현했다.

2018년 7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서 받은 친서를 트위터(현 X)에 공개했다. 트럼프 트위터 캡처

특사 신분으로 평양에 방문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손에 친서를 담은 하드커버가 포착되거나 트럼프 대통령이 친서를 직접 트위터(현 ‘X’)에 공개, 조선중앙통신 게재되는 등의 방식으로 친서 교환이 노출됐다. 의례가 아니라 둘만의 비밀얘기를 하는 창구처럼 비쳤다. ‘하노이 노딜’ 이후인 2019년 8월 친서에선 김 위원장의 원망섞인 토로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는 트럼프에게 “저는 각하를 실망시킬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군사훈련이 중단됐습니까, 어떠한 조치들이 완화되길 했습니까, 나는 인민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합니까”라고 했다. 북한은 핵실험장 문도 부숴버렸고, 미국인 억류자들도 석방했으며, 미군 유해도 보냈는데 2018 6·12 싱가포르 ‘센토사 합의’에서의 단계적-동시적 조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었다. 김 위원장은 “각하께서 우리 관계를 당신에게만 득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는 게 아니라면, 저를 주기만 하고 아무런 반대급부도 받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이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2019년 6월 김정은 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읽는 모습을 북한 매체가 공개하자, 이를 미국 CNN 특파원이 보도하고 있는 모습. CNN 캡처

‘러브레터의 추억’은 미 대선이 한창이던 지난 7월, 5년 만에 소환됐다.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가 연설에서 “나는 김정은과 잘지냈다”며 북·미대화와 북핵 위협 해결을 자신하는 뉴스가 전 세계로 타전되자 북한 반응이 나왔다. 북한은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사 논평 형식으로 “수뇌(정상) 간 잘 개인적 친분관계를 내세우면서 국가 간 관계에 반영하려 한 것은 사실이나 실질적인 긍정적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며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고 국가의 대외정책과 개인적 감정은 엄연히 갈라보아야 한다”고 했다. 북·미대화 역사를 복기했을 때, 미국 정권이 바뀌면 미국이 했던 약속도 무로 돌아갔다고 성토하며 대화에 대한 회의감을 잔뜩 내비쳤다. 이를 두고 해석은 엇갈린다. ‘선 긋기’를 하면서도 개인적 친분 자체는 인정하며 여지를 남긴 메시지라는 평가가 나왔다. 반면 2018-2019년 북·미대화 과정에 깊이 개입한 한 관계자는 김 위원장이 다시는 트럼프와 마주앉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1기때 트위터를 통해 김정은 위원장과 친서를 공개하곤 했다. 트럼프 트위터 캡처

◆핵협상 시즌2, 핵폐기 VS 핵군축?

 

한·미 외교가에서는 북한이 미국과 대화에 복귀할 경우 트럼프 1기때의 핵폐기 협상이 아니라 핵군축 협상이 될 거란 전망도 늘고 있다. 핵군축 협상은 곧 핵폐기란 목표의 포기이자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묵인하는 것이라며 벌써부터 논란이 거세다. 트럼프를 ‘위험 인물’로 묘사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깐 것일 수 있지만, 김 위원장이 1기때의 ‘트라우마’ 탓에 핵폐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라거나, 북한이 이미 ‘불가역적 핵무력’ 선언을 하고 핵무력 고도화까지 진전된 상태에서 현실적으로 ‘비핵화’가 달성 어려운 목표가 됐다는 비관론이 확산한 배경도 있다. 

 

전문가들은 비핵화 원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천식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의 핵보유 묵인이나 인정은 NPT체제를 깨는 것인데, 트럼프는 몰라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를 용인할 수 있겠냐”며 “전 세계가 요동을 칠 것이기 때문에 그런 협상은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과거 협상 스타일상 국방력 강화 5개년 계획을 완성해놓고 협상에 나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 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며 “대화에 나오기 직전 2017년 11월 ‘핵무력 완성 선언’을 했듯, 이번엔 ‘핵무력 고도화 완성 선언’을 하는지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도 “미국이 핵보유 인정을 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군축 협상 가능성은 작다”며 “‘미래의 핵폐기’를 목표로 하는 미국과 핵보유 인정을 원하는 북한이 핵 동결, 폐쇄, 폐기라는 장기에 걸친 단계를 설정하고 일단 접점부터 찾아가는 협상을 할 것”으로 봤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북핵 동결 및 군축이라는 현실론에 동조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은 협상을 열어두고 있을 것”이라며 “대선 이후 일정 기간 미국과의 협상 타이밍을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핵실험이나 ICBM 정상각도 발사는 북한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거나, 협상이 실패했을 때 쓸 카드로 남겨둘 것”이라고 봤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