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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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G가 美 사법부에 남긴 교훈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 전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은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3년 대법원에 입성했다. 그는 판사가 되기 전 변호사와 법학교수 시절부터 여성 및 사회적 약자의 인권 옹호에 앞장섰다. 대법관으로 27년간 재직하는 동안에도 늘 진보적 시각을 견지했다. 비록 그의 견해는 공식 판결문에 반영되지 못하는 소수의견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민주당 지지자와 진보 진영 인사들 사이에선 할리우드 스타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긴즈버그에게 매료됐다. 그의 이름 이니셜인 RBG는 진보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미국 대법관(1993∼2020년 재임). AP연합뉴스

60세의 나이에 대법관이 된 긴즈버그는 2000년대 들어 건강이 악화했다. 췌장암을 비롯해 여러 차례 암에 걸려 수술을 하고 병원 입원 치료도 받았다. 민주당 출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2009년 긴즈버그는 76세가 되었다. 민주당 지지자와 진보 진영 인사들 사이에서 ‘긴즈버그가 스스로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보다 젊고 건강한 진보 성향 법조인을 새 대법관에 임명할 수 있도록 오바마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취지였다. 미국에서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스스로 그만두거나 사망해야 교체가 가능하다. 하지만 긴즈버그는 이 요구를 거부하며 끝까지 대법관 자리를 지켰다.

 

오바마 임기가 끝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도중인 2020년 민주당 지지자와 진보 진영 인사들이 그토록 우려하던 사태가 현실로 나타났다. 87세의 고령인 긴즈버그가 결국 췌장암으로 숨진 것이다. 트럼프는 기다렸다는 듯 후임자를 지명해 발표했다. 강성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52) 판사를 새 대법관 후보자로 발탁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40대이던 배럿은 대법관이 되면 최소 30년은 재직하며 대법원에서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할 것으로 기대됐다. 연방의회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은 배럿 임명 동의안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긴즈버그가 오바마 임기 도중 사임했더라면’ 하는 탄식이 쏟아졌으나 이미 늦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 트럼프는 2020년 당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현직 신분으로 사망하자 그 후임자로 강성 보수 성향의 배럿을 임명했다. AP연합뉴스

최근 대선에서 이긴 트럼프가 2025년 1월 미국의 제47대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한다. 당장 법조계에선 앞선 공화당 출신 대통령 시절 임명된 보수 성향 대법관 일부가 트럼프 2기 임기 도중 용퇴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보수 대법관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클래런스 토머스(76)와 새뮤얼 알리토(74)가 그들이다. 이들이 물러나면 트럼프는 40대나 50대의 젊은 보수 법조인을 새로 대법관에 앉힐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지금 대법원의 보수 우위 구도가 적어도 2045년까지는 그대로 유지될 전망이다. 두 대법관은 시간을 끌다가 진보 성향의 젊은 후임자에 자리를 내줄 기회를 놓친 긴즈버그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사가 확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진보의 아이콘이었던 RBG가 미국 사법부에 남긴 쓰라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