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7일 대국민 담화를 듣고 고구마가 얹힌 듯 속이 답답해졌다. 특히 의료개혁 부분이 그랬다. “국민들께서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차분하고 꼼꼼하게 추진해나가겠다”? ‘응급실 뺑뺑이’ 사망사고와 ‘소아과 오픈런’, 필수·지역의료 인력난 등 국민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의료대란을 대하는 감정은 걱정 정도가 아니라 불안, 허탈, 분노 등의 단어가 어울려 보인다. 무엇보다 의료대란은 걱정해야 할 앞으로의 일이 아닌 최소 10개월째 첨예하게 진행 중인 눈앞의 현실이다.
“차분하고 꼼꼼하게” 표현에선 ‘이제서야?’라는 반감이 치솟는다. 기실 작금의 첨예한 의·정 갈등의 출발점은 정부의 올 2월 비서울권 의대 정원 2000명 확대안 발표였다. 조심스럽게 ‘1000명대 초반’을 예측한 보건복지부 실무자가 깜짝 놀라고 ‘2035년 한국 의사 수는 지금보다 1만여명 많아야 한다’고 추계했던 전문가들조차 정부의 급가속에 우려를 표할 정도였다. 발표 직후 복지부 안팎에서 대통령실이 ‘한 해 2000명씩 향후 5년간 1만명 증원’을 밀어붙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의료계 주장대로 의대 증원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인구당 활동의사 수는 치과의사, 한의사를 포함하더라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70%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은 의료계조차 부인하지 않는다. 한때 의대 증원 찬성 여론이 80%가 넘었다는 점은 증원 필요성을 방증한다. 아마도 ‘3분 진료’에 실망하고 ‘수도권 원정 수술’ 등에 지친 대다수 국민들은 십수년째 동결된 3058명 정원을 깨뜨린 정부가 차제에 필수·지역의료 살리기 정책을 뚝심 있게 펼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과정이었다. 실무자도 모를 정도로 중대 의료 정책 결정이 ‘깜깜이’로 이뤄졌다. 또한 정부는 핵심 이해당사자인 대한의사협회나 전공의, 의대생에 대한 설득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의협이 정부와 협상 테이블을 걷어차고 전공의가 대학병원을 빠져나가고, 대학병원 교수들이 제자와 연대, 번아웃 등을 이유로 줄사퇴하는 등 의료 현장이 점차 악화했다.
그럼에도 정부 대응은 미숙했다. 정책 뒤집기, 대증 처방 등이 난무했다. 진료보조(PA) 간호사가 대표적이다. 의료대란 전 정부는 일부 병원에서 활동 중인 PA 간호사의 존재를 부정했다. 하지만 전공의 공백을 메울 의료자원이 필요해지자 간호법 제정안에 PA 간호사의 의료행위를 허용하는 내용의 간호법 통과에 동의했다. 의대 증원으로 전국 응급실에 환자를 돌볼 의사가 부족해지자 지역 필수의료의 한 축이었던 공중보건의와 군의관을 대학병원으로 차출하기도 했다. 의대생들 휴학 처리 과정에서 보인 정부 행태 또한 ‘차분하고 꼼꼼한’ 정책 추진과는 거리가 멀다.
일관성과 실효성이 부족하다보니 정부에 대한 신뢰는 급전직하했다. 야당과 전공의 참여 없이 11일 출범한 여·의·정협의체에 대해 전공의 대표가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고 평가절하한 배경에는 상황·여건에 따라 입장과 정책이 조금씩 바뀌는 정부에 대한 불신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국가 미래를 위해 정말 강하게 싸우면서도 가야 될 부분과 국민들의 마음을, 불편을 최소화하는 부분을 잘 가려서 한 번 해보겠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은 귀를 의심할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정부가 아직도 이번 사태 본질과 해법 지점을 놓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려스럽다.
어렵게 ‘개문발차’한 협의체가 결실을 보기 위해선 전공의들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아직 2000명으로 잠정 결정된 2026학년도 의대 증원은 물론 1059명으로 공표된 2025학년도 증원분 백지화까지 요구하고 있는 전공의들을 협의테이블로 불러들이기 위해선 정부가 좀더 유연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성의 표시도 필요하다. 협의체에 참여한 의료계 제안대로 ‘올 대입에서의 수시모집 인원의 정시 이월 제한’ 등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전공의 등과의 협의에서 각자의 진정성을 나누고 갈등 지점에 대한 접점을 찾아가다 보면 파국으로 치닫는 의료대란의 해결 실마리도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