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를 당해도 조력을 요청할 환경조차 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피해자들을 위해 가이드북을 만들었습니다.”
서울대 공익법률센터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수사절차 가이드북 ‘피해자 노트’를 발간, 이달 초 공개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과 사건 정황을 설명할 물적·인적 증거를 확보하고 사실관계를 정리해 고소장을 작성하는 방법, 경찰·검찰 수사단계에서 유의할 사항과 피해자가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이 담겼다. 책자는 공익법률센터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다.
13일 서울대에서 열린 피해자 노트 출간기념 설명회에서 주집필자인 마태영 전 공익법률센터 펠로우 변호사는 “변호사나 성폭력상담소의 도움 없이 형사소송 절차에 임하는 피해자들에게 정확한 정보가 주어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올해 9월 대한법률구조공단 서부지부로 자리를 옮긴 그는 현재 피해자 국선전담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책자의 내용은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사건 전후 또는 사건 당시에 들렀던 가게 등의 폐쇄회로(CC)TV 확보가 필요하지만 업주가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당사자에게 영상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경찰 신고 예정이니 보존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만으로 영상기록 확보가 용이해질 수 있다는 조언이 대표적이다.
마 변호사는 또 “경찰 수사관 앞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판단이나 애매한 개념어 대신 정확한 단어로 경험한 것을 진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령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말하는 대신 ‘내가 가스라이팅 당했다고 생각하게 된’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능한 구체적이고 일관성 있게 진술해야 수사관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수사 절차에서 피해자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상세한 팁도 빼곡하다. 가해자가 고소장 열람복사 신청을 통해 피해자의 고소장을 자세히 읽어보고 증거인멸 등을 시도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고소장에 “‘범죄사실’에 한정해 열람복사를 허용하며, 그 외 고소 이유 등은 불허한다”고 명기하는 방법을 택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이 있다.
가해자와의 합의에 대한 실용적 조언도 이어졌다. 마 변호사는 “당장의 금전적 배상이 시급한 피해자에겐 합의가 간편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면서도 “주변의 강압에 의해 원치 않는 합의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합의 금액이 적정한지, 합의의 결과로 가해자가 받을 처벌이 가벼워진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등을 충분히 고민한 후 결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만 마 변호사는 피해자 노트가 성폭력 피해자들의 ‘나홀로 소송’을 권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자가 아님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피해자는 변호사와 성폭력상담소 등 전문가와 지원 기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불가피하게 혼자 싸우는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나침반으로 이 책자가 활용되기를 바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마 변호사는 “피해자 지원기관이 보다 많은 예산과 인력을 바탕으로 더 많은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사회, 모든 피해자가 경찰서에 가는 순간부터 변호사와 함께할 수 있는 사회, 그리하여 이 책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