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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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보기엔 미친 짓… 한국의 ‘이차전지’ 성공신화

K-배터리 30년 전쟁/ 이지훈/ 리더스북/ 2만3000원

 

# 100개에 가까운 접착제를 시험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이상영은 우연찮게 한 가지 물질을 떠올렸다. 독일에서 지내던 시절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료가 작은 통에 처음 보는 분말을 넣고 있었다. 유기 전자 소자에 쓰는 접착 물질이라고 했다. 접착력이 뛰어나다는 말에 당시 이상영은 그것을 조금 얻어 통에 보관해두었다가 귀국할 때 가져왔다. 불현듯 이때의 기억이 떠오른 그는 집에 보관하고 있던 그 물질을 회사에 가져와 시험해보았다.

이지훈/ 리더스북/ 2만3000원

“세라믹이 붙더라고요. 신기하게도 그동안 제가 겪었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죠.” LG화학으로 하여금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고, GM과 닛산을 비롯한 여러 자동차 회사의 수주를 따내고, SK이노베이션과 조 단위의 특허 소송을 하게 만든 기술, 바로 안전성 강화 분리막 SRS 기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일본 기업은 리튬 이온 전지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상용화했지만, 그 전지를 노트북이나 휴대전화가 아닌 자동차에 사용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불이 나는 배터리를 자동차에 어떻게 쓰나?’라는 게 일본 배터리 업체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은 무겁지만 안전한 기존 제품, 즉 니켈 수소 전지(일명 니켈하이드라이드 전지)로 수익을 충분히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리튬 이온 전지 시장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했다. 반면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일본 업체들이 보기에 ‘미친’ 짓을 벌였다.

전기자동차의 심장인 배터리를 만드는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한국 업체들이 전기차 배터리 신화를 써오기까지 과정을 낱낱이 소개한 이 책에 언급된 사례 중 일부다. 배터리는 전기를 담는 연못이란 뜻의 ‘전지(電池)’를 말한다. 이 중 ‘일차전지’는 다 쓰고 나면 버리는 반면 ‘이차전지’는 충전해서 다시 쓸 수 있는 배터리를 의미한다. 이 책에서는 휴대전화와 노트북 등 소형제품부터 전기차 같은 대형 제품을 오랫동안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차전지를 다룬다. 2030년이면 전 세계 이차전지 시장 규모가 4000억달러에 달해 메모리 반도체의 2배가 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만큼 이차전지 기술은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지는 핵심 전략 자산 중 하나다. 저자는 ‘한국은 배터리 기술을 처음 개발한 나라도, 배터리를 처음 생산한 나라도 아닌 후발 주자로서 어떻게 이차전지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자 일본을 제치고 세계적인 기업들을 키워냈을까?’하고 품은 호기심에서 출발해 찾아 나간 답을 친절하게 풀어놓는다. 이를 위해 LG에너지솔루션, 포스코홀딩스, SK온, 에코프로, 엘앤에프 등 국내 이차전지 관련 주요 기업의 최고 경영자와 핵심 기술진 등을 심층 인터뷰하며 오늘날 K-배터리를 만든 결정적 사건을 묻는 한편 방대한 자료를 훑었다. 이들의 생생한 증언과 회고는 독자들을 흥미진진한 K-배터리의 세계로 이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