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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살기’ 또는 ‘온몸으로 소설론’ [심층기획-논픽션 한강 격류 제10화]

“늘 쓰고 싶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많아요. 빨리 쓰지 못하는 게 늘 아쉬운 점인데. 그런 이야기들이 어떤 이미지로 머릿속에 있어요. 거기에 최대한 근접하려고 노력해요. 거기에 도달하려는 열망이 소설을 쓰는 가장 큰 추동력이에요.”(채널예스, 2011.12)

 

그의 머릿속에는 늘 쓰고 싶은 이야기와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빨리 쓰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어떤 이야기나 이미지가 먼저 있고 여기에 맞는 형식이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소설의 착상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강 작가. 뉴스1

“먼저 어렴풋한 소설의 형식이 있고, 강렬한 이미지가 있어요. 그러다가 형식이 떠올라요. 저에게는 형식이 중요해요.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쓰려고 하면 한 페이지도 쓸 수가 없어요. 어렴풋이 떠올라 있던 소설과 맞는 형식을 찾아내는 게 저에게는 가장 핵심적인 착상의 순간이에요.”(정용준, 2022.1/2, 70쪽)

 

그는 늘 다른 글쓰기, 새로운 형식을 욕망하고 시도한다. 심지어 새로운 형식, 다른 글쓰기가 자신을 끌어당기지 않으면 소설을 쓰지 못할 정도로 다름과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아마 그의 새로운 형식과 다른 글쓰기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발상, 시도 때문에, 안드레스 올손 노벨문학상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현대 산문의 혁신가”라는 상찬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특히 시와 단편소설, 장편소설을 동시에 써왔다. 시와 단편소설, 그리고 장편소설이 긴밀히 연결돼 있는 것은 자명하더라도, 조금은 서로 다른 형식의 글을 쓸 때 어떤 차이를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는 “그 과정들은 나에게 매우 직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설명하기 쉽지 않다”면서도 “다만 나에게 실감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가 ‘시간’이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시간의 감각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단편소설을 쓰는 데에는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 이십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장편을 쓰려면 최소한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장 오래 썼던 장편은 4년 6개월이 걸렸다.) 대조적으로 시는 아주 짧은 시간을 요구한다. 오랜 시간 붙잡고 있게 되는 시들이 있기는 하지만, 장편소설처럼 날마다 일상과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며, 신체를 단련해 가면 작업해야 하는 노동과는 비교할 수 없다.”(2023.11/12, 「시와 단편소설, 그리고 장편소설을 함께 쓴다는 것」)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시라는 개별 형식을 선택하는 것일까. 그는 “형식을 어떻게 선택하는가는 좀 더 복잡한 문제”라며 각 형식별로 쓰게 되는 과정과 그 방법을 들려준다.

 

“장편소설을 쓸 때 나는 내적인 질문에 집중한다. 질문들은 나의 글쓰기의 가장 큰 동력인데, 그 질문들을 끝까지 완성해보려면 장편소설이라는 끈질긴 형식이 필요하다. 반면 단편소설은 하나의 장면에서 출발한다. 처음 그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어떤 장면에 다다르는 동시에 작업은 끝나게 된다. 한편 시는 언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한 줄의 문장이 떠올라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 문장은 시의 시작에 놓일 때가 많지만, 때로는 중간이나 마지막 문장에 놓이기도 한다.”(2023.11/12, 「시와 단편소설, 그리고 장편소설을 함께 쓴다는 것」)

 

장편소설들의 질문 여로

 

소설쓰기가 하나의 질문하는 방법이라면, 특히 장편소설 쓰기는 중요한 질문을 끝까지 밀고나가서 완성해보려는 시도라는 이야기다. 비록 답이 나올 수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의 소설, 특히 장편 소설은 그 시기에 저에게 중요한 질문을 끝까지 완성해 보는 그런 거예요. 질문의 끝에 어떻게든 도달을 하면 그 다음 질문이 생겨나고요. 그러면 다음 소설에서 그 질문을 이어가고 그래요. 질문을 완성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닌데요. 그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 그 자체가 답인 것 같아요.”(신연선·오은, 2021.9.23.)

 

장편쓰기는 그에게 있어서 문제의식의 내적 투쟁인 셈이다. 그렇다면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에서 시작된 질문의 여로는 최근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어떻게 흘러온 것일까. 그의 질문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변해왔을까. 또 질문에 따라서 그의 삶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인터뷰와 대담, 간담회 등에서 이뤄진 한강의 목소리를 통해서 다시 정리해 본다.

▶『검은 사슴』=“죽음에 그토록 가까워보였던 네 사람이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결국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서 이 세계를 버티잖아요. 그렇게 제 삶도 한 발 더 앞으로 내디딜 수 있었던 거고요.”(윤경희, 2015, 103쪽)

▶『그대의 차가운 손』=“서로의 몸을 석고로 뜬 뒤 껍데기를 부수는 제의 같은 과정을 통해 한 발 더 나아가게 되고(바라건대 진실 쪽으로)….”(윤경희, 2015, 103쪽)

▶『채식주의자』=“육식을 거부하고 자신이 식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고자 하는 여자의 투쟁(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사실은 파멸의 길인)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폭력을 응시하려 해보고,… ” “이토록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에서 견딜 수 있는가, 껴안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소설이에요. 소설 끝 장면은 앰뷸런스 안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는 시선으로 끝나거든요.” “『채식주의자』를 쓰면서, 한번 끝까지 나아가보고 싶었어요. 저는 그 소설이 극도로 고립된 상태에서 인간의 폭력성을 밀어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 인간의 일원이길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막상 그 소설을 완성하고 나니까 계속 그 자리에 머물 수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결국 우리는 이 세계에서, 결국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나’ 하는 질문이 생겼어요.” (윤경희, 2015, 103쪽.; 정윤희, 2016.6, 16-18쪽.; 김연수, 2014.9, 318쪽)

 

▶『바람이 분다, 가라』=“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그 질문으로 시작해서 우리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가,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고요. 그 소설의 끝에서는 불속에서 기어서 빠져나오는 어떤 여자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쓰면서 내가 살아야 한다는, 애쓰면서 쓰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람이 분다, 가라』를 쓰면서는 자연과학 책을 읽으면서, 오랜 의문이었던 인간의 폭력성과 함께 앞서 말한 신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그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불속을 기어 나오면서 깨끗한 공기쪽으로 배를 밀고 가는 장면이 있는데, ‘살아내야 한다’는 대답을 그렇게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정윤희, 2016.6, 16-18쪽.; 김연수, 2014.9, 318쪽)

▶『희랍어 시간』=“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은 정말 내가 살아내야 한다면, 인간은 어떤 지점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인간의 어떤 연하고 섬세한 자리, 그런 자리를 들여다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희랍어 시간』은 ‘우리가 이 세계를 인간으로서 살아낼 수 있다면, 그건 무엇으로써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했어요. 그 소설 속 두 사람이 손바닥에 글씨를 그려 대화하는 장면을 쓰면서, 인간은 인간을 껴안아야 한다고, 그것이 인간을 살게 한다고 느꼈어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다른 인간이란, 어렵지만 껴안아야 하는 것, 자신을 뚫고 나가 껴안아야 하는 것이라고, 『희랍어 시간』을 쓰면서 생각했어요.” (정윤희, 2016.6, 16-18쪽.; 김연수, 2014.9, 318쪽)

▶『소년이 온다』=“『소년이 온다』에서는 폭력의 상황에서 인간존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써가는 과정에서 질문들이 변하는 것을 느꼈고요. 소설이 출간된 직후에 아마도 인간이 어떤 밝고 존엄한 지점을 바라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정윤희, 2016.6, 16-18쪽)

▶『흰』=“『흰』은 2014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늦여름부터 겨울까지 머물렀는데 1944년에 파괴되고 재건된 바르샤바라는 도시에 머물면서 도시에 살았던 어떤 사람을 상상했고 그 사람이 어쩌면 제가 태어나기 전에 아기로 잠시 머물렀다가 떠난 언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언니에게 어떤 삶의 부분을 감히 주고 싶다면 아마 ‘흰 것’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더럽힐래야 더럽힐 수 없는, 투명함, 생명, 빛, 밝음, 눈부심 그런 것들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정윤희, 2016.6, 16-18쪽)

 

‘소설-살기’ 또는 ‘온몸으로 소설론’

 

그는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서 소설과 함께, 아니 소설을 살았다. 소설을 산다는 것은, 늘 소설과 인물을 생각하고, 마음으로라도 소설 이야기와 인물의 감정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 짧게는 1, 2년, 길게는 4, 5년 동안. 이 같은 독특한 소설 창작법에 주목해, 문학평론가 강지희는 그의 작품을 “고통으로 찍어낸 빚의 지문”이라고 은유했다.

 

“장면으로 제가 먼저 들어가서 그걸 느끼고, 그걸 문장으로 써요. 소설을 쓸 때, 마지막까지 그걸 더 넣으려고 노력해요. 그 순간의 생생함을 조금이라도 더 넣으려고 탈고할 때는 시도 많이 읽어요. 시들이 그런 일을 하잖아요. 순간의 생생함에 육박하는 일. 시의 상태에 가까워져서 소설 전체를 생생한 감각으로 훑고 지나가고, 쉬었다가 또 지나가고 계속 전류가 통하게 하려고. 그냥 생생하게 쓰려고 노력해요…. 글쓰기로 인해서 고통스러워진다기보다는, 고통으로 인해 그런 글이 나온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 같아요.”(정용준, 2022.1/2. 81쪽)

 

이야기 속으로, 인물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쓰기 위해서는 삶에서 소설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 소설에 과격하게 기울어져 있지만, 오히려 균형 잡힌 상태라는 듯. 기울어진 중심이 잡혀서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듯.

 

“2년여 동안은 이 소설하고 살면 되니까, 그런 상태가 좋아요. 오히려 이 소설에서 다음 소설로 넘어가는 사이가 힘든 것 같아요. (스스로 의지하기보다,) 제 모든 걸 소설에 기울여, 늘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상태가 좋아요. 그게 균형 잡힌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삶에 소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나는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 그런 상태.”(채널예스, 2011.12) 그것은 어쩌면 글쓰기 이외의 모든 일을 무나 무에 비슷하게 돌리는 일이기도 했다. “글을 쓸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한다. 걷지도 먹지도 못한다. 가장 수동적인 자세로, 글쓰기 외에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고 한 단어씩 써간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한강, 2011 봄, 41쪽)

 

자연히 힘도 많이 들고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의 일정한 시간을 소설 한 편과 맞바꾸는 장편소설 쓰기가, 장편소설을 쓰는 상태가 좋았다고 고백한다.

 

“장편소설을 쓰는 시간이 좋아요. 장편을 쓰는 데 정말 오래 걸리잖아요. 1년도 걸리고 3년도 걸리고 길게는 4, 5년…. 인생의 긴 기간을 소설 한 편하고 맞바꾸는 그 상태를 제가 좋아하는 것 같아요.”(강지희, 2011 봄, 47쪽)

 

‘소설을 산다’거나 ‘소설 이야기와 인물 속으로 들어가서 온몸으로 쓴다’ 등의 그의 생각과 개념은 김수영 시인의 ‘온몸의 시론’이나 철학자 스피노자의 ‘심신 평행론(psychophysical parallelism)’ 또는 ‘심신병행론’을 떠올리게 한다. 김수영은 1968년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온몸의 시론’을 선언했다. 스피노자 역시, 자연과 신체로부터 정신을 이원론적으로 분리시켰던 데카르트와 달리, “정신과 신체는 동일한 개별자의 두 측면”이라며 정신적 현상과 육체적 현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독립적이면서도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강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저는 정신적으로 힘들 때 그게 분명하게 신체화되는 편이에요. 관념적이라고 불리는 것과 신체적인 부분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붙어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소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 역시 어떤 살아 있는 육체로, 마음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 몸으로 느껴져요. 이 소설이라는 몸속에서 감각적인 것들, 사유, 감정, 언어가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어렵게 조율해야 하는 일이 생기거나 하기보다는 함께 움직여요.”(한강·강수미·신형철, 2016.9, 20쪽)

 

그의 소설쓰기는 심지어 심신병행론보다도 한발 더 나아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즉,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언어와 감정까지 함께 연동돼 움직이고 나아가는 것이 소설쓰기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밀고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히 ‘온몸으로 소설론’이라고 부를 만하다.

 

“소설을 써갈수록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제가 소설 속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어요. 가장 어렵고 무서운 부분이어서, 쓰는 순간순간에는 거의 그것에만 집중해야 했어요. 쓰는 순간에 제가 그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저의 언어로써 정말 불가능하지만 근접할 수 있을지, 그것이 관건이었고, 그 집중력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상태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저로서는 이 소설을 쓰는 일이, 관념과 몸과 언어와 감정이 모두 함께 연결되어 나아가는 경험이었어요.”(한강·강수미·신형철, 2016.9, 21-22쪽)

 

질문을 완성해가는 소설을 사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이야기와 문제의식의 변화, 소설의 변화, 몸의 변화를 동시에, 그리고 다양하게 경험하게 된다. 한편의 장편을 다 쓰고 난 뒤에, 그는 이전으로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다.

 

“…소설들을 쓸 때마다 변화를 경험했다고 생각돼요. 특히 장편소설을 쓰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요. 어떻게 보면 저의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장편소설들을 통해 완성해보려 애쓰는 식으로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소설들, 제 질문들, 제 삶, 제 몸이 함께 움직이며 변화하며 아주 천천히 나아가고 있고, 더듬거리고 서성거리고 뒤척이면서 근근이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윤경희, 2015, 103쪽)

 

“성냥 불꽃처럼 확 당겨지는 단편소설”

 

반면 단편쓰기는 그가 지나가고 있던 자리의 감각과 감정과 생각을 담고 있다. 즉, 단편소설은 “좀 더 개인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단편소설은 좀 더 개인적인 것입니다. 삶이 저라는 인간을 흔들거나 베고 지나가거나 지금 지나가고 있는 그 자리의 감각과 생각과 감정을 씁니다. 인간에 대한 질문들을 끈질기게, 전심전력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게 장편소설이라면, 단편은 개별 장들처럼 전체 구도 속에서 계획된 어떤 게 아니고, 저라는 인간이 여기까지 (때로는 기어서, 때로는 꿋꿋하게 걸어서, 때로는 어둠 속을 겨우 더듬어서) 살아온 기록입니다.”(김은경, 2018.11.30)

 

단편소설은 마치 성냥 불꽃처럼 확 당겨진다고, 그는 『노랑무늬영원』의 「작가의 말」에서 단편의 본질을 설명하기도 했다.

 

“단편은 성냥 불꽃같은 데가 있다. 먼저 불을 당기고, 그게 꺼질 때까지 온 힘으로 지켜본다. 그 순간들이 힘껏 내 등을 앞으로 떠밀어줬다.”

 

『노랑무늬영원』 개정판의 「작가의 말」에서 이를 조금 더 부연한다. “이 소설들은 원고 청탁을 받지 않고 썼다. 혼자서 써놓고는 서랍에 넣어주고 생각날 때마다 열어 조금씩 고쳤다. 그렇게 한 편 쓸 때마다 여러 달 시간을 들여서인지, 책 전체에 나 자신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들을 직접 옮겨 놓은 것은 아니지만, 돌이킬 수 없이 배어든 정서들이 있다. 두텁디 두텁게. 간절하게. 때로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찌르듯 고통을 주며.”(→제11화에 계속)

 

*참고문헌은 연재가 끝난 뒤 정리해서 한꺼번에 게시 예정입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