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이후 처음 열린 다자외교 무대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모든 관심은 그를 향했다. 한·미·일 정상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그간 다져온 안보협력을 유지하기 위해 3국 정상회의 정례화에 나섰고,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에 맞서 ‘자유무역’ 수호를 역설했다.
◆트럼프 시대, 불가역적 조치
15일(현지시간) 한·미·일 정상은 지난해 8월 미국 캠프데이비드 회동 이후 1년3개월 만에 2024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가 열린 페루 리마에서 모였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이 자리에서 3국 협력 사무국 설립에 합의했다. 내년 1월 출범할 트럼프 행정부 체제에도 3국 협력이 흔들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현지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3국 협력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며 “사무국은 안보, 경제, 첨단기술, 인적교류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사업을 점검, 조율하는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고 했다. 사무국은 한국 외교부에 우선 설치되며, 사무국장직은 한·미·일이 2년씩 순환해 맡기로 했다.
퇴임을 두 달여 앞둔 바이든 대통령은 윤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새로운 리더십 출현에도 계속 한·미 관계를 성원하고 뒤에서 돕겠다”며 힘을 보탰다.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윤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는 “미국 조야의 초당적 지지가 있는 만큼 차기 미국 행정부와도 3국 협력을 잘 이어나가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에이펙 정상회의에서 회원국들은 폐막일에 다자무역 질서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는 이른바 ‘마추픽추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공정하고 비차별적이고 투명하고 포용적이며 예측 가능한 무역·투자 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는 보호무역을 앞세워 관세 인상 등을 주장하는 트럼프 당선인의 정책에 반대하는 기류로도 읽혔다. 특히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에이펙 정상회의 마지막 세션에서 “일방주의와 보호무역주의 부상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정조준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시대에도 한·미·일 협력이 유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통화에서 “너무 당황하거나 서두를 필요는 없다”며 “한·미 동맹은 흔들리지 않는 전략적 포괄 동맹이 됐으니 그 기조를 잘 유지하기 위해 차기 정부에 신의껏 성실히 할 것이란 기조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민정원 국립외교원 교수는 “중요한 건 상견례를 통해 정상 간의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며 “바이든 행정부는 가치 외교를 중시했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실리외교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미 동맹을 공고히 하면서 어떤 분야에서 협력해 나갈 것인지, 트럼프 당선인이 관심 있어하는 미국의 이익에 한국이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전략적 정책 기조 검토해야
16일 폐막한 에이펙 정상회의는 트럼프 2기를 앞두고 보호무역주의가 확산할 것이란 우려 속에 각국 정상들은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윤 대통령은 전날 리마 국립대극장에서 열린 에이펙 최고경영자 서밋에 참석해 “지금 세계는 공급망 분절과 보호무역주의로 인한 다자무역체제의 위기를 맞고 있다”며 “기후위기와 저성장의 고착화,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 등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에이펙 인공지능 표준 포럼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에이펙 정상회의 첫 세션인 ‘초청국과의 비공식 대화’에서 “에이펙 정상들이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세계의 평화·안전을 위한 강력한 규탄의 목소리를 발신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고 인류의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위한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성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윤 대통령은 에이펙 정상회의 리트리트(Retreat·의전 등 형식적인 면에 구애받지 않고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회의 방식) 세션에 참석해 에이펙 청년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미래번영기금 설립을 제안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이번 에이펙에서 캐나다·페루·브루나이·베트남 정상들과도 각각 양자회담을 열고 경제협력과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특히 페루와는 방산협력과 광물협력 관련 양해각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내년 경북 경주에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을 주제로 에이펙 정상회의 개최를 공식화했다. 2026년에는 중국이 의장국을 맡을 예정이다.
윤 대통령은 18∼19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여기에는 의장국인 브라질을 포함해 미국·중국·일본·독일·프랑스·인도 등 주요국 정상들이 대거 참석해 트럼프 시대 출범을 앞두고 국제사회의 치열한 외교전이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