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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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의시읽는마음] 백장미의 창백

신미나

절정이 지나간 백장미는

오래전 옛날을 지나온 얼굴이고

 

당신은 한 톨의 소금도 집어먹지 않고

싱겁게 웃었습니다

 

투석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무서운 꽃밭에서 풀어졌습니다

 

장미가 맹렬히 붉기를 거부할 때

모든 색에서 멀어져

다만 흰빛으로만 희미해질 때

 

속눈썹이 붉은 아이가

검은 입을 크게 벌리며 오고 있습니다

양팔을 벌리며 당신을 데리러 오고 있습니다

백장미의 꽃말을 찾아보니 ‘순수’나 ‘존경’ 같은 거대한 단어들이 잇따라 나온다. 나는 맹렬히 붉은 장미보다 흰빛의 장미가 더 화려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이 꽃은 절정을 지난, 오래전 옛날을 떠난 얼굴인가 보다. 병과 싸우며 모든 색에서 멀어진 사람의 얼굴. 핏기 없는….

 

시를 읽으며 나는 자연히 병원의 삭막한 풍경과 풍경 속을 천천히 걸어나가는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 힘들다는 투석을 마치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집에 당도해서는 거의 쓰러지듯 몸을 누이는 사람. 사람이란 어째서 아픈가. 고통은 어째서 지치지도 않고 자꾸만 찾아드는가.

 

탄식과 함께, 시에 담긴 어떤 결기를 읽는다. “장미가 맹렬히 붉기를 거부할 때”라는 부분을 지나며, 끝을 받아안는 한 사람을 본다. 그가 마음속으로 여러 날 공글려 길어낸 단단한 체념 같은 것. 서늘한 아름다움 같은 것.

 

박소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