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태재대 총장(전 고려대 총장), 김용학 전 연세대 총장, 이창용 한은 총재, 하택집 하버드대 교수, 천명우 예일대 교수, 이진형 스탠퍼드대 종신교수.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고등교육재단(KFAS) 장학생 출신이라는 점이다. 재단은 1974년 첫 해외유학 장학생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에게 등록금과 생활비 등을 지원하면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재단은 서울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에 위치한다. 하지만 뜻있는 기업가가 세운 재단임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 이름만 놓고 보면 정부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사실은 국비 유학제도 시행보다 3년이나 앞서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설립한 비영리 공익법인이다. 흔한 재단 이름에 기업명이나 아호도 없다. 설립 취지를 퇴색시킬 수 있다는 최 선대회장의 확고한 의지 때문이다. 재단 출신 석학 면모만 봐도 장학사업이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돕는 차원을 넘어 ‘인재보국(人材報國)’의 길을 튼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26일 창립 50주년을 맞는 재단은 세계 유수 대학에서 배출한 박사만 950여명에 달할 정도로 명실상부 대한민국 인재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김유석 재단 대표는 13일 인터뷰에서 “지난 50년간 최고 수준의 학자를 양성하는 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인류 공통 난제를 해결하는 인재 발굴에 재단이 앞장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재단의 철학은 무엇인가.
“최 선대회장은 ‘십년수목백년수인(十年樹木百年樹人)’의 인재 철학을 갖고 있었다. 사람을 키우듯 나무를 키우고, 나무를 키우듯 사람을 키운다는 것이다. 1974년 최 선대회장이 사재 5440만원을 털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26일 창립 50년을 맞아 ‘나무를 가꾸듯 사람을 키우고 인재의 숲으로 인류공영에 기여한다’는 새로운 미션을 선포할 계획이다. ‘시대를 이끄는 KFAS형 인재 양성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포용적 지식공동체 구축’이라는 비전도 제시한다.”
―‘KFAS’라는 재단 명칭에 사연이 있나.
“재단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 첫째는 장학사업을 명분으로 회사나 개인을 홍보하지 않고 ‘우수 인재 양성’이라는 과제 실현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Korea Foundation for Advanced Studies’라는 재단 영문 명칭 의미도 남다르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서 따와 작명한 것처럼 ‘조건 없이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재단의 지향점을 담아냈다. 세계 석학과 교류 등을 위한 포럼과 유학 지원 등을 위해 국제 콘퍼런스홀과 전자도서관, 국제회의장까지 갖출 정도로 인재 양성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
―첫발을 떼게 된 동기는.
“출범 초 100명의 박사 양성이 목표였다. 처음에는 재단 출신 박사들을 모아 연구중심대학(원)을 만들자는 얘기도 있었다. 출범 당시에는 노동집약적 산업만으로 먹고살 수는 있었다. 하지만 1980∼1990년대 지식 집약적 산업이 발달하면서 그에 걸맞은 인재가 필요했다. 당시 국내에서 교육을 할 만한 여건도 안 되다 보니 가장 좋은 방식은 위탁교육이나 해외연수였다.”
―그간의 성과는 어떤가.
“지금은 952명의 박사학위자를 배출했고, 현재 공부 중인 70∼80명까지 생각하면 머지않아 1000명 돌파가 시간문제다. 해외유학장학제도, 대학 특별장학제도, 한학연수장학제도 등을 통해 5000여명의 장학생도 지원했다. 최병일 KFAS 명예사무총장, 이재열 서울대 교수, 송지연 서울대 교수, 조인영 연세대 교수, 김선혁 고려대 교수, 송의영 서강대 교수 등도 재단이 배출한 석학들이다.”
―50년간의 네트워크가 자산 아닌가.
“‘네트워크’라는 단어 자체는 배타적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 조심스럽다. ‘음수사원’(飮水思源: 우물물을 먹을 때 우물 만든 사람을 생각한다)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잊지 않고 환원하는 게 중요하다. 2000년대 초 재단을 거친 좋은 학자가 많이 생겨나면서 북경포럼, 상해포럼, 동경포럼 등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재단 출신만 참여하는 건 어찌 보면 역할을 축소하는 것이다. ‘느슨하지만 끈끈한’ 포용을 하는 네트워크가 맞는 길이다. 지식의 역할을 확장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하다.”
―뒤쪽 벽면을 채운 책들은 무엇인가.
“오래된 도서관 같아 보이지 않나. 비치된 책만 1만5000권이다. 3만권의 책 중 절반은 서고에 보관하고 있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초창기 다른 나라 유학생과 달리 우리나라 학생들은 정보 부족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장학생들이 읽고 싶어도 국내 대학에서 소장하고 있지 않거나 비싼 책들을 재단에서 구비한 것이다. 일부 책에는 빨간색의 동그란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 선배 장학생들이 보내준 강의계획서를 참고해 구매한 책이다.”
―지원 혜택이 어마어마하다.
“초창기엔 오해도 있었다. 모든 지원에 대한 아무런 조건도 없는 데다, 설립 초기 재단이 남산에 있다 보니 중앙정보부에서 지원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있었다. 미국 대학에서 이공계는 박사학위를 받으면 장학금과 일정 금액의 생활비를 지원한다. 이공계는 연간 1만5000달러 정도 된다. 하지만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등 인문사회계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분들을 위해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등 연 7만5000달러를 5년간 지원하고 있다.”
―재단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창용 한은 총재 얘기가 있다.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고시 공부를 하려다 지도 교수인 한승수 전 국무총리한테서 재단 얘기를 들었다. 재단 장학생으로 하버드 유학길에 오른 계기다. 26일 재단 50년 행사에 축하 영상 메시지까지 보내줬다. 직접 참석하고 싶었지만, 때마침 금통위가 열리는 주간이라 외부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른 순수 민간 공익재단과 차이는 무엇인가.
“학부 및 석박사 과정에 대한 장학금을 주는 곳은 규모의 차이가 있겠지만 2∼3곳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곳은 어드미션을 받아야 지원이 된다. 반면 우리 재단은 6∼7월 연구성과나 추천서 등을 통해 미래 가능성을 보고 미리 선발한다. 박사지원 과정부터 지원을 받는 해외유학 장학준비생이다. 미국을 예로 들면 미국사, 미국문화, 영어 등을 미리 교육해 손쉽게 유학생활에 적응하도록 6개월간 준비 기간을 갖는다. 올해에도 인문·사회과학 10명, 자연과학 12명 등 총 30명의 후보를 선발했다.”
―기초학문의 위기라고 한다.
“재단의 출발은 인문사회과학이었다. 국가에서 과학기술 분야와 응용학문 등 실용 분야 중심으로 지원이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선대회장은 순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를 중점적으로 지원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성을 띠게 되면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문학 소양을 가진 인재 양성이 절실하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1980년대 자연과학 분야, 1997년부터는 정보통신 분야가 각각 추가됐다.”
―재단 이름에 후원자나 기업이 없다.
“일종의 레거시(legacy)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제가 외교관 출신인데, 국비 유학을 다녀온 후 민간기업에 취업하면 비용을 국가에 반납해야 한다. 선대회장이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미 (그런 제한 조항을) 만들었을 것이다. 학문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를 만드는 순수한 목적에 맞춰져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 재단 실무자들이 선대회장에게 장학금 축소나 선발 인원 조정을 건의했지만, 재단의 다른 지출을 줄이면서까지 유학생들을 지원했다.”
―최종현학술원도 있지 않나.
“선대회장 20주기를 맞아 최태원 회장이 지식의 선순환을 이어가기 위해 사재 520억원을 출연해 만든 것이다. 지정학적 위기와 과학기술 혁신이 가져올 도전과 기회를 분석해 대응전략을 모색하자는 취지다. 세계 주요 대학, 연구소와의 협력과 창의적인 연구지원이 주된 활동이지만 ‘인재 양성’과 ‘지식 교류’라는 측면에서 재단과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외교관 출신이 대표를 맡고 있어 이채롭다.
“어찌하다 보니 최종현학술원 대표까지 겸하고 있다. 선대회장 이름을 가진 기관의 장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자면 1996년 외무 공무원을 시작해 1998년 청와대 의전비서실 파견 시절 IMF를 맞았다. 그때 전경련 회장이 최 선대회장이다. 1998년 5월쯤 전경련 회장단 오찬에 최 선대회장이 휠체어를 타고 오셨다. 국가와 경제에 대한 책임과 사명감이 느껴졌다. 외교관 역량은 개인적 생각이다. 학술원 업무는 지정학적 위기와 과학기술 발전을 연결해 임팩트를 내는 것이다. 일천한 외교부 경험과 맥킨지 컨설팅, BP 등 글로벌 사업에 몸을 담았던 부분이 작용한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