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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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이 인생 스승… 의미 있는 일 하고팠죠” [차 한잔 나누며]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탈북민 청소년 교육 20년 헌신
“고문 탓 몸 못 가누던 천 시인
돌 던진 아이들에게도 사탕 줘
좋은 어른 기억이 설립 밑거름
분단 아픔 삶으로 체감한 아이
반드시 필요한 시대 올 겁니다”

“그 눈빛은 달랐어요.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빛이었죠.”

 

억만금을 들여서도 살 수 없는 경험이 있다. 1977년 서울 노원구 상계동 빈민촌, 한 막걸리집 7살짜리 둘째 딸 일상이 그랬다. 주막 앞에 쪼그려 앉은 아이들은 부랑자들에게 ‘저리 가!’ 하며 돌을 던졌다. 동생과 친구들을 보호하려 앞장섰던 아이가 제일 씩씩한 둘째였다. 그 아이의 돌멩이가 어느 날 몸을 비틀며 막걸리집으로 들어오던 한 부랑자의 머리를 맞혔다. 머리에서 피가 났다. 놀란 아이들에게, 그는 “괜찮다, 괜찮다, 이쁜 것들,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돌에 맞은 이는 ‘동백리 간첩단 조작 사건’ 때 고문을 당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행려병자, 천상병 시인이었다. 천상병은 이 막걸리집을 단골로 삼고, 갈 때마다 딸들 손에 알사탕을 쥐여 줬다. 그때마다 아이들에게 “요 이쁜 것들” 하며 웃었다.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이 18일 서울 강서구 여명학교에서 만나 세계일보와 이야기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아저씨 눈빛은 무섭게 병들어 정신을 잃은 다른 부랑자들하고 달랐어요. 우리를 너무 사랑하는 눈빛이었죠. 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시대의 상처를 자신의 뒤틀린 몸으로 다 받아낸건데, 그걸 극복하고 사람들을 끌어안았던, 그 눈빛을 제가 보고 자랐던 것 같아요.” 막걸리집 둘째가 바로 제1호 교육청인가 탈북민 대안학교인 여명학교를 20년 이끌어온 조명숙(54) 교장이다.

 

조씨가 18일 서울 강서구 여명학교에서 세계일보와 만났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탈북민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에 나선 이유, 힘든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을 묻다 보면 어느새 천 시인 이야기로 흘렀다. 참혹한 환경에 처해 있던 어린 자신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줬던 “좋은 어른”에 대한 기억이 잊히지 않는단 증거였다. 조씨는 중학생이 돼서야 TV에 천상병이 나오는 것을 우연히 보고 “우리 아저씨 시인이구나” 알게 됐고 “나도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따뜻하고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조씨는 천 시인이 “제 인생의 숨은 스승”이라고 했다.

 

조씨는 상계동 빈민촌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자랑이었다. 대학생 땐 일하다 다친 이주노동자들을 도왔다. 1994년 경제정의실천연합 농성, 1995년 명동성당 농성으로 이어지며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산재보험을 적용하게 된 역사의 현장에 그가 있었다. 이때 인연이 된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러 중국에 갔다가 재중 탈북민을 처음 봤다. 한국에서 일하다 손, 발이 잘린 중국인들이 자기보다 더 불쌍히 여겨 ‘이 사람들 좀 도와주라’며 소개한 대상이 탈북민이었다. 1990년대 대량 아사 사태로 중국에까지 나온 탈북민이었다. 조씨는 이들을 국내로 데려오려 했지만 황장엽 망명 사건 직후라 중국의 협조를 받을 수 없었다. 조씨는 탈북민 13명과 목숨 걸고 중국·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최초의 제3국 경유 탈북 난민 구출이었다. 이른바 ‘핑퐁난민사건’(1997), 그는 27살 갓 결혼한 새댁이었다.

 

이 사건으로 매스컴에 얼굴이 나간 탓에 더 이상 구출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조씨는 탈북민 아이들 교육을 새로운 사명으로 삼았다. 여명학교의 탄생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천 시인이 있었듯, 아이들에겐 ‘좋은 어른’이 가장 필요하고, 그러면 아이들도 자연스레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거라 믿는다. 그렇기에 지역공동체와 시민들도 이 아이들에게만큼은 ‘탈북민’ 하면 떠오르는 일부 극단적 이미지를 내려놓아 주길 바라고 있다. “어느 구름에 비 들어 있을지 모른다고 하잖아요. 우리 역사에서 분단시대를 삶으로 체감한 이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할 때가 올 거라고 봅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