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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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실손 보험 빼먹기’ 천태만상

“실손(실손의료비 보험) 있으세요?” 의료진이 환자에게 비급여 진료를 권하기 전에 묻는 말이다. 실손 보험은 질병·상해 치료 시 보험 가입자가 낸 의료비를 보상하는 상품으로, 국민 4000만명이 가입해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린다.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자기부담금과 비급여 진료비를 보상해준다. 허리가 아플 때 받는 도수·체외충격파 치료, 감기 걸렸을 때 맞는 수액주사 등이 비급여 진료에 속한다. 한 번에 몇 만원인데 여러 번 치료받아야 해 비싸지만 실손 가입자는 보험사가 내주기 때문에 부담이 덜하다.

‘보험 사기’ 목적으로 병원을 차려 실손 보험금을 무려 64억원이나 빼돌린 의사·손해사정사 등 일당이 그제 적발됐다. 환자에게 성형 수술, 피부 미용 시술 등 비급여 진료를 한 뒤 도수 치료나 무좀 레이저 치료, 줄기세포 시술을 한 것처럼 진료 기록을 위조했다고 한다. 실손 보험의 허점을 잘 아는 보험설계사 150여명이 이 병원의 주 고객이었다. 경찰은 이들에게 범죄단체 조직 혐의까지 적용했다. 한 40대 남성은 11개월간 병원 8곳에서 비급여 물리치료를 342회나 받고 실손보험금 8500만원을 청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실손 보험금이 줄줄 새고 있다. 실손 보험은 가입자 중 65%가 보험금을 한 푼도 안 받는 반면, 5%도 안 되는 가입자가 전체 보험금의 60% 이상을 타 간다. 올 상반기 지급한 4조8102억원 중 59%가 도수·체외충격파 치료 등 비급여로 나갔다. 보건·금융 당국의 비급여 관리가 허술해서다. 이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겨 과잉 진료·의료 쇼핑을 하지 않는 의사와 환자가 바보 취급을 당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적자를 본 보험사는 매년 보험료를 올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실손 보험 빼먹기’는 필수 의료 붕괴와 의료비 증가로 이어져 문제다. 실손 보험 탓에 피부과·안과·정형외과 등에서 고가의 경증 치료로 손쉽게 돈 버는 구조가 굳어지면서 필수 의료 분야의 구인난이 심각하다. 급여 항목에 실손 보험이 보장하는 비급여를 ‘끼워 파는’ 혼합 진료가 늘어 건보 재정에도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실손 보험과 비급여 과잉을 대대적으로 수술해야 한다.


채희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