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율리아네 크링, 2006년 태어났고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사진은 이렇다. 정자기증을 통해 태어났고 정자 제공자는 1965년생, 키 175㎝에 당시 몸무게 73㎏, 눈동자 색은 짙은 파란색.”
엄마 에바 크링(58)은 딸 율리아네 크링(18)이 처음 유치원에 갈 때 이런 내용이 적힌 책자를 만들어 들려 보냈다. 에바는 누군가가 기증한 정자를 통해 혼자 아이를 낳은 ‘비혼모’이다. 에바는 “기본적으로 항상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며 “30대에 만나던 애인과 함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고 36살에 처음 비혼출산을 생각한 뒤 39살에 엄마가 됐다”고 말했다.
◆확장된 출산권, 확대된 기쁨
덴마크는 2007년 보조생식술 관련법을 개정한 뒤 법적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여성에게 난임·불임치료를 열었다. 원하면 파트너가 있든 없든 출산할 권리를 보장받게 됐다. 이후 보조생식술로 아이를 갖는 여성은 꾸준히 증가했다.
20일 덴마크 내무·보건부 통계에 따르면 최근 덴마크 신생아 8명 중 한 명은 보조생식술로 태어난다. 공공의료 지원을 받은 시술 건수는 2012년 약 3만4000건에서 10년 뒤인 2022년 3만9000건 이상으로 증가했다. 코펜하겐 보건행정센터는 한 해 동안 태어나는 아이의 12%가량은 보조생식술을 통한 출생으로 파악했다.
세계 최대 규모 정자은행 중 하나인 크라이오스 대표 제이콥 닐센은 “정자기증을 원하는 수요자를 보면 대략 한부모 가정이 50∼60%, 이성 커플은 10∼15%로 미혼 여성이 임신을 원할 때 평균 나이는 약 37세”라며 “이는 전 세계적 수요를 반영한 비율”이라고 설명했다.
보조생식술 수요 증가와 함께 공여자를 적절히 관리하는 고민도 커졌다. 크라이오스는 특정인의 유전자가 무분별하게 퍼지는 일을 막기 위해 정자와 난자 공여를 받을 시 판매 건수를 제한하고 있다. 닐센 대표는 “각 공여자는 전 세계에 25개 가족만 가질 수 있다”며 “모든 정자은행은 기증자와 독점 계약을 체결해 다른 회사에는 기증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체 공여 희망자 중 실제로 자사가 받아들이는 인원은 100명 중 5명 수준”이라며 “그들이 하려는 결정이 어떤 의미인지 공여자와 상세히 대화하고 유전자 건강 정도를 검사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9월12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만난 에바도 딸을 이렇게 낳았다. 에바는 40살, 가임연령 거의 막바지에 율리아네를 낳았다. 그에게 출산 전후를 비교할 때 가장 달라진 점을 묻자 “‘왜 더 일찍 엄마가 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 자식이 있으면 좋다’는 말을 비로소 깨닫고 할 수만 있다면 한 명 더 낳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이제는 덴마크에서 에바처럼 혼자 출산한 이가 드물지 않지만, 그가 임신한 2005년만 해도 주변에서 비슷한 경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미혼 여성이 보조생식술로 임신하기란 불법이었지만 에바는 법의 허점을 노려 임신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율리아네를 낳은 뒤 에바는 정부가 한부모 가정에 제공하는 정책적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 중심으로 정책이 집행된 덕이다. 비혼출산 시 한부모 가정은 경제적 여유가 부족할 수 있는데 덴마크 정부는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어떻게 태어났든 안정된 환경에서 양육할 수 있도록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에바는 정부의 구분 없는 지원으로 자신의 양육이 가능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로 치면 어린이집 원장인 에바는 “내 수입도 있고, 정부가 한부모 가정에 제공하는 양육비와 지자체가 아이에게 주는 보조금이 나온다”며 “일반 가정에 비해 한부모 가정은 아이를 보육시설에 보낼 때 가정에서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적고 소득공제나 세액공제 혜택은 더 커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또 덴마크는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연령인 때까지 부모가 직접 등하교를 같이 해야 하는데 아이가 어리면 오후 3시30분부터 퇴근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이는 일반 가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성 권리와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하는 헬레네 포르스베리 여성협의회(Kvinderadet) 상무이사는 “한부모 가정도 자녀를 양육하며 좋은 삶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좋은 보육 시스템”이라며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를 갖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출산·양육 같은 기본적인 삶의 권리가 결혼 여부나 다른 요소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부모가 될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물론 덴마크에서도 부모가 모두 있는 4인 가구를 전형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가장 먼저 떠올린다. 율리아네는 아빠가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진 않았을까.
율리아네는 “언제 인지했다는 걸 기억할 수도 없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는 아빠가 없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에바는 율리아네에게 자기 정체성 형성의 일환으로 처음부터 보조생식술로 딸을 낳았다고 알려줬다. 율리아네는 “친구들 중에도 다양한 가족 형태가 많다”며 “나는 엄마만 있지만 이혼 가정도 많고, 이혼 후 한쪽 부모가 새 애인과 동거하는 집도 많아서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은 안 했다”고 했다.
덴마크라고 처음부터 모든 가족 형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비혼출산 인구가 늘기에 앞서 이들에게 출산할 권리를 열어줘야 할지를 두고 사회적으로 치열한 논의가 있었다.
재생산권에 관해 활발히 연구해온 스틴 아드리안 노르웨이 북극대 교수(사회학)는 “2007년 법 개정 당시 중요한 질문 중 하나가 ‘독신 여성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가’라는 부모 자격 논쟁이었다”며 “남자와 여자가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사회적 규범이 있어서 논란이 많았지만, 일부 미혼 여성 중 법의 허점을 노려 엄마가 된 사례가 있었고 이런 사례가 점점 많아지며 (비혼출산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아드리안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한 연구를 언급하며 “아이들 성장 시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빈곤과 부모 간 갈등으로, 이혼한 가정보다 헤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싸우는 부모가 아이에게 더 악영향을 끼친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아이들은 다양한 가족 유형에서 모두 잘 자란다는 연구가 도출돼 전통적인 가족 구성에 반드시 얽매이지는 않음을 시사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점점 가족이란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고 재구성되고 있다”고 봤다.
때로 비어 있는 ‘부’의 자리가 걱정되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에 에바는 “율리아네가 유치원에 갈 때도 아이들이 왜 아빠가 없는지 물어볼 때 분명하게 보여주라고 책자를 만든 것”이라며 “당시에는 미혼여성이 출산한 경우가 드물어서 파트너 없이 임신한 개념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율리아네에게는 자부심을 갖게 하려고 그랬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 가족 개념에서 아빠가 없어도 외롭거나 건강하지 않은, 정상과 비정성 그런 구분은 없다고 본다”며 “어떤 형태가 낫다는 생각은 없다”고 했다.
정자공여로 아이를 낳은 뒤 경험한 놀라운 일도 있다. 정자공여로 아이를 낳은 가족들이 교류하는 페이스북 모임에서 율리아네는 자신과 똑같은 생물학적 아버지의 유전자로 태어난 또 다른 자매(half-sibling)를 2019년 우연히 찾았다. 이들은 네덜란드 국적으로, 실제 아빠가 있지만 임신에 문제가 있어서 정자를 기증받았다.
에바는 “딸들끼리 같이 여행도 가고, 엄마끼리 가끔 통화한다”며 “어릴 적 아이들이 한 행동이 비슷한 점이 있어 신기하고 가족이 더 확장된 느낌”이라고 전했다.
곧 성인이 되는 율리아네는 종종 친구들과 임신·출산에 관한 얘기를 한다. 율리아네는 “곧 독립하는데, 엄마가 그때 외로움을 타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가족을 꾸리는 건 좋다고 생각하고 가능하다면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에바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준 율리아네는 “가족이란 부모가 다 있는 전통적인 ‘정상가족’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뤄진 관계 같다”며 “그게 결혼이든 동거든, 자녀가 있든 없든, 유전자로 연결돼 있든 아니든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맺어진 관계가 가족”이라고 정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