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강제강국을 거론할 때 독일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국가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분단을 딛고 20세기 중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한 덕분에 21세기 초반까지 명실상부한 유럽대륙을 대표하는 산업국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최근 독일 경제에 대한 경고가 속속 들려온다. 유럽 경제가 침체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특히 독일 경제가 급격한 하강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탓이다. 심지어 이제는 독일을 ‘유럽의 병자’라고 부르는 이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최악의 위기… 2년 연속 역성장 가능성
독일 경제의 부진은 각종 지표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달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에 따르면 올해 독일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0%로 제자리걸음을 할 것으로 예측됐다. 스페인(2.9%), 프랑스(1.1%), 영국(1.1%), 이탈리아(0.7%) 등 유럽지역 핵심 경제강국 중 성장률이 가장 낮은 국가가 독일이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성장률이 -4.1%를 기록한 뒤 2021년 대대적 양적완화로 3.7%로 반등했던 독일 경제는 이후 3년 동안 추락을 거듭하는 중이다. 2022년 GDP 성장률이 1.4%로 전년 대비 반토막나더니 2023년 급기야 -0.3%로 역성장을 기록한 것이다. IMF 전망대로라면 올해는 그나마 반등한 것이 되지만 시장에서는 이마저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기류가 강하다. 독일의 GDP 증가율이 결국은 올해도 마이너스를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2년 연속 역성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파다할 정도로 현재 독일의 부진은 심각하다.
독일의 모든 산업들의 생산이 감소하고 있다. 건설업을 제외한 산업 생산이 2017년에 정점을 찍은 이후 올해까지 16%나 감소했으며, 기업 투자는 최근 20분기 중 12분기나 감소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최근 미국 반도체기업인 인텔이 독일 공장 신설 계획을 무기한 연기하는 등 외국인 직접 투자도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로빈 윙클러 도이체방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산업 생산 감소가 “독일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침체”라고 평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기업들까지 휘청거리고 있다. 한때 세계 최대 자동차기업으로 각광받던 폴크스바겐은 최근 3곳의 독일 내 공장을 폐쇄하고 수만명의 인력감축을 단행하겠다고 발표했고, 타이어 제조업체인 콘티넨탈은 200억유로 규모에 달하는 자동차 사업 부문의 분사에 나섰다. 자동차 산업의 부진 때문으로 독일 자동차 생산은 2016년 570만대에서 지난해 410만대로 7년 동안 160만대나 줄었다. 이 영향 속 2018년 이후 자동차산업에서만 6만여개 일자리가 사라졌다.
자동차 산업뿐만이 아니다. 중공업 분야의 강자인 티센크루프는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철강사업 매각에 나섰지만 노사간 갈등이 심화하며 기업 내분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독일 최대 조선기업인 마이어 베르프트는 지난 9월 4억유로의 정부 구제금융으로 가까스로 파산을 면하기도 했다.
◆뒤처진 산업구조…비즈니스모델 붕괴
이런 부진이 경기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독일 경제의 근본적 체력 저하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인공지능(AI), 전기차, 반도체 등 세계 경제 흐름을 견인하는 첨단산업에서 뒤처진 결과라는 것이다.
영국 가디언은 “미국과 영국은 인구 10만명당 5.22개의 AI 스타트업이 있는 반면 독일은 1.9개에 불과하다. 전기자동차로의 전환에 있어서도 독일의 대형 자동차기업들은 중국산 저가 전기차의 위협에 근시안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면서 전통산업 구조에 안주해온 독일 경제의 현실을 지적했다.
산업 생산의 기틀을 다지는 연구개발(R&D) 투자도 부진하다. 2021년 기준 독일의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3.1%로 미국은 물론 스웨덴, 벨기에, 일본, 스위스 등에도 뒤진다.
독일산업연맹(BDI)의 지그프리트 루스바움 회장은 지난 9월 “독일의 비즈니스 모델이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탈산업화는 진정한 위험”이라며 2030년까지 독일에 남아 있는 산업 생산의 5분의 1이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에서 2022년 발발한 전쟁이 결정타가 됐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수입되던 에너지의 가격이 전쟁 영향으로 급등한 탓이다. 독일은 산업구조 자체가 에너지 집약적이어서 타격이 더 컸다.
이는 독일 제품의 가격경쟁력 상실로까지 이어졌다. 향후 불안한 국제정세 속 유럽 및 중동의 에너지 공급이 언제든지 다시 불안해질 수 있기에 지나친 에너지집약적 산업구조 역시 독일 경제의 근본적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독일 경제의 구조적 하강은 사회 전체의 불안감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불안한 독일 국민들은 소비를 최대한 줄이고 저축을 늘리며 장기 침체에 대비하는 상황이다.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독일 국민들은 현재 소득의 11.1%를 저축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보다 두배가량 높은 수치다. 이는 자연스럽게 내수 부진으로 이어져 가뜩이나 부진했던 경제를 더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 중이다.
◆정치·경제·사회 대개편 임박
경제문제에서 기인한 불안감이 정치의 격변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도좌파 성향인 사회민주당(SPD), 녹색당과 중도우파 성향 자유민주당(FDP)이 뭉친 ‘신호등 연정’이 이달 초 붕괴했다. SPD 소속의 올라프 숄츠 총리가 FDP 대표인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을 전격 해임한 데 따른 것이다. 직면한 경제문제 해결에 대한 해법에 대한 이견 차이가 연정 붕괴로까지 이어졌다.
숄츠 총리는 기존 산업 부흥과 노동자 보호 등을 위해 전기차 보조금 등에 세원을 쓰려한 반면, 린트너 장관은 건전재정과 기업 감세에 포커스를 맞췄고 이런 견해 차이로 연정이 계속 이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숄츠 총리가 내년 2월23일 조기 총선을 치르기 위해 다음달 자신의 신임 여부를 의회 표결에 부칠 계획이라고 쥐트도이체차이퉁(SZ) 등 현지 매체들이 지난 12일 보도했고, 이변이 없다면 2월 총선이 치러질 전망이다.
총선에서 독일을 이끌 리더십의 교체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상당하다. 지난 8~11일 인자(INSA)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중도우파인 기독교민주연합(CDU)과 바이에른기독교사회연합(CSU)의 연합이 지지율 32.5로 1위를 기록했다.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19.5%로 뒤를 이었고 숄츠 총리가 이끄는 SPD는 15.5%에 그쳤다. 녹색당이 11.5%로 뒤를 이었다. 여론조사 지지율 대로라면 CDU·CSU 연합을 중심으로 보수 색채가 강한 새 정부가 꾸려질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수십년간 독일을 대표해 온 전통산업과 사회복지 등 사회경제 체제 전반에 대한 대수술도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부침을 전 세계는 긴장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깊은 침체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독일은 여전히 유럽 경제의 핵심이자 전 세계 경제의 주요 국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리더십 교체와 경제 개혁 과정이 자칫 삐끗하기라도 하면 유럽뿐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가 위기로 빠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독일 정치의 우경화도 걱정거리다. 유럽 곳곳에서 극우정당이 이민 문제 등으로 세를 불리고 있는 가운데 독일에서도 경기침체까지 겹치며 AfD가 여론조사 2위로까지 올라선 것이다. AfD는 유럽 극우정당들이 뭉친 유럽의회 교섭단체에서도 퇴출될 정도로 극우성향이 더 강하다는 점에서 독일 정치에서 AfD의 위상 강화를 전 세계가 우려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의 칼럼니스트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최근 독일 정계에서 극우정당의 급부상은 직면한 경제문제로 인해 독일 국민들의 자신감이 바닥을 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면서 “유럽의 핵심 국가인 독일이 주변국들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남으려면 경제적·정치적 동력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해진 독일은 유럽과 전 세계에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