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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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86억원에 팔린 500원짜리 바나나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가 특징인 ‘테네브리즘’(tenebrism) 기법으로 17세기 바로크 미술을 열었다. 이탈리아 대표 화가로 이탈리아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3대 천재화가로 불린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얼굴에 주름 패고 허름한 옷차림의 가난하고 평범한 이들이다. 아름다운 옷을 걸친 엄숙한 표정의 사도들 모습에 익숙해 있던 당시 사람들에겐 생소했다. 그는 예수를 일반 세속인처럼 바꿔 그리는 등 신성을 보는 관점도 바꿨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 AFP연합뉴스

이탈리아 출신 현대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64). 정식 미술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인물이다.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다 미술계에 뛰어들었다. 평면적 회화를 거부했다. 그를 알린 건 1999년 쿤스트할레(바젤)에서 전시된 ‘아홉 번째 시간’이었다. 붉은 카펫 바닥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운석에 맞고 쓰러진 작품이다. 교황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며 종교계 비난이 극에 달했다. 선을 넘는 작품은 이 뿐이 아니다. 18K 금으로 만든 103㎏의 황금 변기의 이름을 ‘아메리카’로 짓고는 관객이 직접 사용하게 했다. ‘미술계의 이단아’로 불렸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건 2019년 아트바젤(마이애미)에서 작품 ‘코미디언’을 선보이면서다. 코미디언은 강력 접착테이프를 이용해 벽에 붙여놓은 바나나 한 개가 전부다. 코미디언은 세 가지 에디션으로 각각 12만~15만 달러(약 1억6000만~2억1000만원)에 팔려나갔다. 당시 한 행위예술가가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퍼포먼스”라며 벽에 붙어 있던 바나나를 떼어 먹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카텔란은 인터뷰에서 “예술 작품이 불편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보기 좋은 디자인 제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언제나 권위와 맞서는 과정에 있으며, 아픈 곳을 긁어주는 손톱 같다”고 했다.

 

5년이 지나 다시 등장한 코미디언이 지난 21일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620만 달러(약 86억7000만원·수수료포함)에 팔렸다. 낙찰자인 중국 출신 가상화폐 기업가 저스틴 선은 바나나와 접착테이프 한 개씩, 그리고 썩은 바나나 교체 방법 등을 알려주는 설치 안내서, 진품 인증서를 받았다고 한다. 이전 소장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뉴욕타임스(NYT)는 “수년간 미술계에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바나나가 팔렸다. 팔린 작품 속 바나나는 맨해튼 과일 가판대에서 35센트(약 500원)에 구입한 돌(Dole)사 제품”이라고 전했다. 작품을 구매한 저스틴 선은 “(카텔란의 작품은) 예술과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 가상화폐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문화적 현상을 나타낸다”며 “곧 먹어 치울 것”이라고 했다. 영미권에서 ‘It’s Bananas!’라는 표현은 “말도 안 돼. 미쳤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미지가 예술로 각광받는 시대라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다. 5년 만에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코미디언의 가격 인상 폭은 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박병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