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이스탄불 간선도로에 갇혀있다 보면 빨강, 파랑 불빛을 번쩍이며 갓길로 앞질러 가는 차들을 자주 보게 된다.
간혹 '경찰'(Polis) 표시를 붙인 순찰차들도 있지만, 아무런 표시 없는 검정 고급 승용차가 전면 그릴 안쪽에 설치된 경광등을 켜고 달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관용차 혹은 암행 순찰을 하는 경찰차이겠거니 했는데, 현지인들은 뜻밖의 설명을 해줬다.
"거의 다 민간인이 모는 일반 차량입니다. 시중에 파는 경광등을 멋대로 부착해서 다니는 거예요."
실제 튀르키예 온라인 쇼핑몰을 검색해보니 경찰 경광등과 유사한 LED 조명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가격도 300∼1천200리라(약 1만2천∼4만9천원)로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수준이다.
이런 꼼수 운전이 판치는 이유는 이스탄불의 심각한 교통 체증 때문이다.
글로벌 교통정보분석업체 인릭스에 따르면 지난해 이스탄불은 미국 뉴욕, 멕시코 멕시코시티,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미국 시카고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교통 혼잡이 심한 도시로 분석됐다.
인구 1천600만명이 모여 사는 튀르키예 최대 도시 이스탄불은 지난달 기준 등록 자동차만 576만7천여대에 달한다. 319만대 정도인 한국 서울보다 80% 정도 많다.
도로 인프라는 빠르게 늘어나는 교통량을 따라가지 못한다.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또 오스만제국 중심지로 약 1천700년간 번성하면서 각종 문화유산이 빽빽하게 들어찬 탓에 근대에 들어 제대로 된 도시계획이 이뤄지기 어려웠다. 땅을 파다가 유적이 나와 공사가 백지화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이스탄불을 유럽과 아시아로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다리가 3개, 해저터널이 1개뿐이다. 해협 너비나 폭은 한강과 비슷하지만, 수심이 최대 110m에 이르는 데다 유속이 빨라 교량을 세우기가 힘들다고 한다.
사정이 이래서일까, 운전 문화도 한국과는 다른 편이다.
차선을 바꿀 때 방향지시등, 즉 '깜빡이'를 켜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앞차가 조금만 꾸물거려도 냅다 경적을 울린다.
하지만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경광등을 밝히고 갓길로 운전하는 행위는 차원이 다르다. 경찰 등 관용차를 사칭하는 문제도 있고, 정말 필요할 때 빠르게 달려야 하는 구급차 등 긴급차량의 이동을 방해할 수도 있다.
이를 보다 못한 당국이 결국 칼을 빼 들었다.
튀르키예 의회는 지난 21일(현지시간) 경광등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운전자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는 법률 개정안을 의결했다.
앞으로는 허가받지 않은 경광등을 사용하다가 적발되면 9만6천리라(약 390만원)의 벌금이 부과되고 운전면허가 30일간 정지된다. 해당 차량을 운행하는 것도 30일간 금지된다.
만약 운전자가 1년 내 같은 일로 또 단속에 걸리면 벌금액이 19만2천리라(780만원)로 늘어난다. 운전면허 정지와 차량운행 금지는 60일간 적용된다.
알리 예를리카야 튀르키예 내무장관은 22일 성명을 내고 "올해 들어 10월 말까지 무허가 경광등 사용 등으로 적발된 운전자가 총 1만444명에 이른다"라며 "앞으로는 이런 불법행위를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합>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