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국교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속도가 붙던 한·일 관계 개선 흐름에 급제동이 걸렸다.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 추도식’에 진정성 없는 조치로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훈풍이 돌던 한·일 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더불어 예상 가능했던 우려에도 철저하게 대응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우리 정부의 안이한 대처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한국의 추도식 불참 선언에 일본 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대일관계 개선에 드라이브를 걸던 한국 정부도 난감해졌다.
24일 외교가에 따르면 정부는 사도광산 추도식 관련 논란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에도 막판까지 협상 의지를 보여왔다. 한국에서 일본을 방문하는 사도광산 강제동원 노동자 유족에게 모욕적이지 않은 행사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추도식을 이틀 앞두고 일본 측 정부 대표가 야스쿠니신사 참배 이력이 있는 극우 인사(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로 확정되면서 분위기가 급속도로 악화했다. 이런 기조로 볼 때 행사 당일 드러날 추도사 내용에 한국인 노동자 언급이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종합적으로 추도식 참석에 따른 ‘굴욕외교’ 파장이 더 커질 것으로 판단함에 따라 결국 참석 입장을 번복한 것으로 보인다.
전날 외교부는 “추도식 관련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24일 추도식에 불참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불참 결정 배경으로 양측 간 이견이 커서 추도식 전에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한·일관계는 이번 사태로 다시 삐거덕거리게 됐다. 사도광산 추도식은 7월 일본이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로 하면서 양국이 합의한 주요 사안이었던 만큼 일본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나 일본 중앙정부 고위 관계자 참석이나 추도사 내용 등 진정성을 보여줄 핵심 사안이 막판까지도 발표되지 않은 것은 물론, 이것이 정해지기도 전에 단 며칠 앞으로 다가온 추도식 날짜부터 급박하게 공개되는 등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 반복됐다. 그러다 마지막에 발표된 일본 측 정부 대표를 보며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2022년 8월15일 일본 패전일에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인물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추모 행사의 정부 대표로 오는 건 현장에 참석하는 한국인 유족을 모욕하는 부적절한 일이라는 지적이었다.
처음부터 추도식에 대한 양국의 시각차가 분명했지만, 각자 ‘동상이몽’하며 행사를 추진한 끝에 파국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은 추도보다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기념에 방점이 있었고, 한국은 조선인 노동자 추도가 중요했다. 일본이 추도식 명칭에 ‘감사’를 넣으려다 한국의 반대로 뺀 부분, 추도식이 일본 정부가 아닌 민간단체 주관 행사인 점 등이 이를 드러낸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으로 올라갔으니, 이곳에서 일했던 ‘모든 노동자’의 노고에 감사 및 추도를 하겠다는 정도가 일본 측의 이해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인 노동자는 그 일부에 포함될 뿐 이 행사의 주인공 성격은 아니었던 셈이다. 추도식에 참석하는 한국인 유족을 일본 측이 ‘공식 초청’하는 것이라면서도 참석 비용을 한국 외교부가 부담하기로 한 것, 유족 방일 관련 일본이 어떤 별도 프로그램 등을 마련하지도 않은 것은 그렇게 설명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지난 수개월 동안의 추진 과정 내내 계속 지적됐던 만큼 정부는 철저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지적과 함께 외교참사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게 됐다. 한국 정부는 추도식 협상 과정에서 연내 추도식 개최,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 참석 등의 큰 목표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를 놓고 보면 두 가지 모두 관철되긴 했지만, ‘진정성 있는 추모행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도광산 추도식 관련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은 대통령실은 표면적으로는 추도식 불참에 따른 한·일관계 경색 우려에 대해 “협의를 통해 풀어나갈 여지가 충분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이미 여러 차례 만나 협력 의지를 다져온 만큼 양국이 그런 부분(사도광산 추도식 문제)도 잘 협의해가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도 공식 대응은 하지 않은 채 일부 외무성 간부 등의 전언으로 유감을 표하고 낙담하는 목소리를 내는 정도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일본 정부 관계자는 “양국이 서로 양보해 (이 문제가) 장기화해서는 안 된다”며 관계 개선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는 견해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