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주(65·가명)씨는 2년6개월 뒤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토록 보고 싶은 아들과 다시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현재 경기도 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명주씨는 매달 두 번은 꼭 아들 면회를 간다. 잠은 잘 자는지 동료 수감자들과 다툼은 없는지, 걱정스레 이야기를 듣다 보면 면회 시간 10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아들이 사무치게 그립다고 말하는 명주씨이지만, 출소일이 다가오는 게 두렵다. 아들의 죄명은 ‘존속살해미수’다. 함께 살던 30대 아들은 5월15일 새벽 잠자던 그에게 흉기를 휘둘렀고, 명주씨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엄마 호강시켜 주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아들이었지만, 10년 전 중증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뒤 약을 먹다 끊기를 반복했다. 약을 끊은 지 한 달 반쯤 됐을 무렵, 아들은 수년간 자신을 돌봐온 엄마를 ‘마귀’라고 생각하고 해치려 했다.
그날 이후 명주씨에게 집은 가장 소중하면서도 두려운 공간이다. 둘이 살던 집에는 아들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보고 싶을 때면 아들의 옷을 끌어안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다가도 밤이 되면 사건 당시가 떠오르며 소름이 끼친다. 평범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려 하지만, 집에만 오면 명주씨의 마음은 무너진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명주씨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했다. 입·퇴원, 약 복용 관리 등 아들을 돌보는 데 세월을 다 쓴 그는 이젠 약물·상담 등 치료가 꼭 필요한 상태이지만 찾아갈 곳이 마땅치 않다. 그러는 새 아들의 출소는 점점 가까워지고 명주씨의 불안도 커지고 있다.
◆중증 정신질환자 가정파괴 외면한 국회
25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적절히 치료받지 못한’ 중증 정신질환자의 곁에서 가족이 치료·돌봄 책임을 떠맡고 시름하는 동안 그들을 지탱해 줄 제도·정서적 기반은 사실상 전무한 상황으로 나타났다. 현행 정신건강복지법상 정신질환자의 가족에 대한 지원은 환자의 회복과 자립에 필요한 ‘정보 제공·교육’ 정도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국회가 중증 정신질환자와 그들 가족에 대한 입법에 손을 놓은 사이 숱한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조현병, 양극성 정동장애, 중증도 우울장애 등의 중증 정신질환 진단 혹은 치료 이력이 있는 사람은 63만6532명에 달했다. 국내 인구(5132만5329명)의 1.2%로, 100명 중 1명꼴이다.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정도의 규모이지만, 여전히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 탓에 치료를 중단하고 숨어버리는 환자들도 적잖다.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중증 정신질환 진료 이력이 있지만, 2023년 병원에서 치료받지 않은 사람은 15만2006명에 달했다.
중증 정신질환은 약물·상담 등 꾸준히 치료받으면 증상을 관리하며 일상생활을 할 수 있지만, 치료를 중단하는 경우 극단적으론 자신을 돌보던 가족을 해치는 참극으로까지 이어졌다. 정신질환자의 가족에게 치료·돌봄 의무를 떠안기는 ‘보호의무자 제도’가 법제화돼 있는 가운데 가족을 보호할 테두리는 부재한 ‘입법 공백’이 한몫한 비극이었다.
김영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연합회 정책위원장은 “신체·발달장애인에 대한 가족지원은 법적 근거가 있지만, 중증 정신질환자의 가족지원에 대한 법적 근거와 중앙정부의 지원은 전무하다”고 토로했다. 발달장애인 가족지원의 경우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32조)에 근거해 20만원 이하의 부모상담 바우처 지원, 일시돌봄 제공서비스, 부모 교육 등이 이뤄지고 있다.
정신질환 가족지원 관련해선 법이 없다 보니 정부의 책임도 없었다. 현재 복지부가 정신질환자의 가족을 위해 실시하고 있는 사업은 전혀 없는 상태다. 복지부 관계자는 “중증 정신질환자의 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과·부서 차원의 구체적인 사업은 따로 없다”고 밝혔다.
다만 이 관계자는 “지역사회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여러 사업들 중 하나로 중증 정신질환자와 그들 가족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중증 정신질환자가 센터에 등록한 경우에만 가능한데, 올해 6월 기준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등록한 인원은 8만697명에 그쳤다. 중증 정신질환 당사자와 가족은 “센터에서 지원이 있는 줄 몰랐고, 센터에 등록한 순간 동네에 질환이 알려질까 두렵다”고 입을 모았다.
◆22대 국회선 ‘입법 공백’ 해결될까
물론 앞선 국회에서 정신질환자의 가족지원을 위한 입법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다. 지난 21대 국회에선 국민의힘 이종성 전 의원이 정신질환자 가족의 일상적 부담을 경감하고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돕기 위한 ‘일시적 돌봄 및 휴식지원 서비스 제공’ 등의 조항을 담은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전 의원도 정신질환자 가족에 대한 상담·돌봄 지원 등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는 동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바 있다. 여야 구분 없이 정신질환자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해당 법안들은 갖은 정쟁에 밀려 끝내 임기만료 폐기 운명을 맞이했다.
다행히 이번 22대 국회에서도 중증 정신질환자와 그들 가족에 대한 지원을 다룬 입법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최근 본지가 중증 정신질환자와 그들 가족의 현실을 5회에 걸쳐 연재한 ‘망상, 가족을 삼키다’ 기획보도 이후, 민주당 남인순 의원은 정신건강복지법 38조 ‘가족에 대한 정보제공과 교육’ 조항을 ‘가족지원’ 조항으로 바꾸고, 가족 상담 및 역량강화, 가족 돌봄·휴식 지원, 가족동료지원가 양성 등의 내용을 담은 법안을 발의할 예정인 것으로 파악됐다. 남 의원실 관계자는 “이달(11월) 말 또는 다음달 초에 발의할 것”이라고 전했다.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실도 ‘정신건강권리옹호센터’ 설치와 가족을 옥죄는 ‘보호의무자 제도’ 관련 조항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증 정신질환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20대 아들에게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한 또 다른 50대 모친은 인터뷰 끝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이 원망스럽고, 부끄럽진 않아요. 아파서 그런 거니깐. 내 나름 마음을 다잡곤 있는데, 가끔은 어딘가 의지하고 편안해지고 싶어요.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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