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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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유족 자체 추도식… 日에 항의도 못한 주일대사 [‘반쪽’ 사도광산 추도식]

추도사서 감성적 표현만 강조
日 반성·성찰 촉구 내용 없어
日선 되레 “불참 유감” 밝혀

유족 9명 韓 정부 주최 추도식 참석해
사도광산 전시물 관람하며 탄식·눈물
‘뒤통수’ 맞은 정부, 日에 유감 표명 없어
日 “이쿠이나 참석 문제 없어” 적반하장

국힘 “외교당국 안일한 자세 반성·점검”
민주 “퍼주기 외교 결과가 추도식 참사”

일제강점기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 사도광산으로 끌려와 가혹한 노역에 시달렸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생전에 생활했던 기숙사 터에 25일 그들의 유족 9명이 섰다. 강제동원에 대한 사과도, 반성도 없었던 전날 일본 주최 ‘사도광산 추도식’에 불참한 이들은 한국 정부 주최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사무치는 심정을 엄숙한 표정과 눈물로 드러냈다. 박철희 주일한국대사는 “80여년 전 강제로 동원돼 가혹한 노동에 지쳐 스러져 간 한국인 노동자분들의 영령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추도했다. 그러나 추도가 아닌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성과보고회 같았던 일본 추도식에 대한 항의 혹은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일절 없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정중히 의사소통을 해왔는데 한국 측이 참가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며 적반하장격의 태도를 보였다.

 

박철희 주일한국대사가 25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소재 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터 제4상애료에서 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다. 뉴스1

박 대사와 유족, 정부관계자 등이 참석한 추도식은 추도사 낭독과 묵념,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박 대사는 추도사에서 “영영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 안기지 못한 한국인 노동자의 한스러운 마음, 귀국 후 사고 후유증과 진폐증으로 힘든 삶을 이어간 분들에게는 어떤 말도 온전한 위로가 될 수 없을 것”며 “사도광산의 역사 뒤에는 한국인 노동자분들의 눈물과 희생이 있었음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추도식에 참가한 여성 유가족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10분여 만에 공식 일정이 마무리된 뒤 유족들은 각자 준비한 술잔을 바치는 등 별도로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유족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게 한이지만 부모님을 모실 수 있게 됐다”며 “우리 자손들이 부모님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추도식 이후 유족들은 인근 사도광산을 찾아 폐광 전 갱도를 복원한 전시 시설을 관람했다.

 

70대로 보이는 한 유족은 19세기 후반의 사도광산 모습을 전하는 전시물을 보다 “아버지 이름도 어딘가 적혀 있는 곳이 있을 텐데”라며 탄식하듯 가슴속 한 맺힌 말을 토해냈다.

 

◆입 닫은 한국, 적반하장 일본

 

한국, 일본의 큰 관심을 반영하듯 양국 언론이 추도식장을 찾았으나 박 대사는 추도사 말고는 일절 입을 닫았다. 일본 기자들이 전날 일본 주최 추도식 불참 이유, 별도 추도식 개최 등에 대해 질문을 던졌으나 대답하지 않았고, 한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일문일답도 없었다. 추도사에서는 강제동원 노동에 대해 “가혹한 노동에 지쳐”, “슬픔의 나날을 견딘 가족” 등 감성적인 표현을 강조했을 뿐 사죄, 반성 없이 사도광산을 근대유산으로만 미화, 포장하려 했던 일본 정부의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내용은 없었다.

 

묵념하는 유족들 25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 인근 조선인 기숙사 터에서 열린 한국 정부 주최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유족과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한국 정부 관계자와 유족들은 강제동원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없었던 전날 일본 주최 ‘사도광산 추도식’에 불참했다. 사도=AP뉴시스

‘뒤통수’를 맞은 외교부도 일본 정부를 향해 공개 유감 표명이나 사과, 재발 방지 요구 등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한·일 당국 간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각 층에서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정부 간 소통이 이뤄지고 있고 발전적으로 풀어가도록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태열 외교장관이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 중이라 양국 외교장관 간 소통이 이뤄질 가능성은 있다. 당국 간 비공개 소통 과정에서 항의나 유감 표명이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 측 추도식 문제점에 대해 우리 정부의 공식 언급 없이 물밑 소통만 진행 중이라는 것은 일본이 한 단계 완화된 메시지를 내놓도록 우리 정부가 사정하는 식으로 사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외교부는 정부가 일본 주관 추도식에 불참한 이유에 대해서 “일측 추도사 내용 등 추도식 관련 사항이 당초 사도광산 등재시 합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측 추도식에 불참하고 우리 자체 추도행사를 개최한 것은 과거사에 대해 일측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우리 정부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라며 이같이 전했다. 다만 정부가 전날 일본 측 추도식 보이콧이라는 강경 카드를 꺼내놓고도 제대로 된 공개 유감 표명이 없는 것은 의아하다는 지적이다. 결국 국내적으로는 결기를 강조하고, 정작 일본을 향해서는 그에 걸맞은 대외 메시지도 없다는 것이 ‘이중 플레이’ 아니냐는 반응이다.

 

반면 일본은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관방장관이 나서 전날 한국의 일본 측 추도식 불참에 대해 불만을 표현했다. 추도식의 형식, 내용에 문제가 없는데 한국 측이 불참을 결정한 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하야시 장관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한국 측이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입장은 아니지만, 한국 측이 참가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 측 추도식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와 세계유산 등재에 관계된 민간단체로 구성된 실행위원회가 개최한 것으로 일본 정부에서는 이쿠이나 아키코(生稻晃子) 외무성 정무관(차관급)이 참석해 인사말을 했다”며 “정부는 지역과 협력해 한국 정부와도 정중히 의사소통을 해 왔다”고 주장했다.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참배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던 이쿠이나 정무관이 추도식 대표로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종합적 판단을 통해 외무성에서 홍보·문화와 아시아·태평양 정세를 담당하는 이쿠이나 정무관 참석을 결정했다. 문제는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강변했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여당 조차 “정부 안일, 반성·점검 필요”

 

추도식을 둘러싼 논란은 국내 정치권에서도 뜨거웠다. 여당에서도 사도광산 추도식이 반쪽으로 전락한 데 대해 아쉽다는 평가가 나왔다.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우리 정부의 요구사항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우리 외교당국의 안일한 태도 때문은 아니었는지 겸허한 반성과 점검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추 원내대표는 이어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 어린 추모를 포함해 과거 식민통치 역사에 대한 분명한 속죄와 반성은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를 위한 기본 전제”라고 강조했다.

 

배현진 의원도 이날 국회 문체위 전체회의에서 “부인할 수 없는 정부의 외교적인 실패이자 무성과”라며 “사도광산 추모식에 정부와 유족들이 끝내 불참하게 된 사태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참담한 마음”이라고 했다.

 

야당은 “추도식이 축하행사로 전락했다”며 “해방 이후 최악의 외교참사”라고 정부를 향해 질타를 쏟아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당 회의에서 “1500여명의 조선인 강제노동은 사라지고 대한민국 정부 스스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최악의 외교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또 “그동안 참 많이 (일본에) 퍼줬다. 독도도 역사도 위안부도 강제동원도 군사협력도 퍼줬다”며 “이런 저자세 퍼주기 외교의 결과가 바로 사도광산 추도식 참사”라고 일갈했다.


사도=강구열 특파원, 김병관·배민영·김예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