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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명 받는 ‘빨리빨리’ 문화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1990년대 중반 한국에서는 ‘삐삐’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무선호출기 사용이 유행했다. 오늘날의 휴대전화와 달리 삐삐는 숫자 전송만 가능했다. 그 점에 착안해 삐삐 이용자들은 숫자로 자기네끼리만 통하는 암호를 만들어 소통의 도구로 활용했다. ‘사고가 났다’는 뜻의 0049, ‘일이 일사천리로 잘 된다’는 의미의 1472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두고 신문지상에 ‘삐삐 약어(略語)’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숫자로 된 이들 약어 가운데 일부는 특정 계층을 넘어 전 국민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빨리빨리’ 하고 독촉하는 8282가 대표적이다.

 

1995년 당시 국내에서 선보인 다양한 무선호출기(일명 ‘삐삐’) 제품들. 세계일보 자료사진

과거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의 특징을 하나만 꼽는다면’이란 질문을 던지면 ‘빨리빨리’라는 답변이 돌아오곤 했다. 해외여행 도중 자신이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현지인이 웃으며 “빨리빨리”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에피소드는 너무 흔해 식상할 정도다. 무슨 일이든 ‘속도’를 가장 중시하는 한국의 풍토가 외국인들 눈에는 그만큼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1995년 5월 어느 일간지에는 국내에 체류하는 미국인이 한국 수사기관의 신속한 일 처리를 거론하며 “도저히 며칠 안에 해결될 수 없는 성격의 사건이 한국에선 해결되고 있다”며 혀를 내둘렀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부실 공사에서 비롯한 초대형 인재(人災)가 터진 것이 계기로 작용했다. 특히 500명 넘는 시민이 목숨을 잃은 삼풍백화점 참사는 “건설 현장에서 ‘빨리빨리’ 하고 독촉하는 관행부터 근절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참사 후 1년이 지난 1996년 6월 한 신문은 특집으로 국내 건물 공사 실태를 점검한 뒤 “‘빨리빨리’를 외치며 대충 설계하고 시공하는 관행이 여전하다”며 우리 사회의 안전 불감증을 매섭게 질타했다.

 

호세 무뇨스 현대자동차 북미권역본부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런데 한국인들 스스로도 고쳐야 한다고 여기는 ‘빨리빨리’ 문화를 아주 긍정적으로 여기는 외국인이 있어 눈길을 끈다. 스페인 출신으로 최근 현대자동차 대표이사에 내정돼 화제의 중심에 선 호세 무뇨스 현 현대차 북미권역본부장이 주인공이다. 그는 지난 2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국내 자동차 업계가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우리 현대차의 ‘빨리빨리’ 문화는 굉장한 강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현대차에 합류한 2019년 이후 가장 역점을 둔 일이 바로 ‘빨리빨리’ 문화의 발전이라고 소개했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세상이 확 바뀌게 생긴 마당에 ‘빨리빨리’ 문화도 재조명을 받는 모양새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