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라트비아)을 위해 싸울 수 없었던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에드가르스 린케비치스 라트비아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아 6·25전쟁 전사자 명비에 헌화하며 한 말이다. 북유럽 라트비아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와 더불어 ‘발트 3국’으로 불린다. 한국과는 별로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라트비아에 6·25전쟁 참전용사가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라트비아를 비롯한 발트 3국은 덩치가 작은 국가들이다 보니 과거 독일, 폴란드, 스웨덴, 제정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현 러시아) 사이에서 각축장으로 전락해 인명과 재산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2차대전을 계기로 소련에 강제 병합됐다가 1991년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의 결과로 독립을 되찾은 역사는 세 나라가 똑같다. 불리한 지정학적 여건 탓에 시련을 겪은 점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를 계기로 독립한 라트비아는 1991년 10월 한국과 수교했다. 라트비아가 2015년 서울에 대사관을 개설한 이후에도 한국은 한동안 주(駐)스웨덴 대사가 라트비아를 겸임하다가 2019년에야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양국 관계에서 라트비아가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었던 셈이다.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당시 라트비아는 소련에 강제로 병합된 상태였다. 자연히 라트비아는 6·25 공식 참전국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소련 강점기 시절에 라트비아를 떠난 젊은이들이 미군 소속으로 한국 편에서 전쟁에 참전했다고 한다. 그 숫자는 최소 14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4명이 전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들의 이름은 전쟁기념관 내 유엔군 6·25 전사비 명비에 새겨져 있다.
이날 린케비치스 대통령은 라트비아 출신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렸다. 그는 6·25 당시 라트비아가 소련에 점령된 상태였음을 언급한 뒤 “이들(라트비아 출신 참전용사들)의 헌신은 세계 평화, 민주주의, 그리고 더 나은 미래라는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신념에 바탕을 두었다”며 “이러한 가치는 현재까지 라트비아와 한국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연결 고리”라고 강조했다. 린케비치스 대통령은 전날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한국은 신뢰할 수 있는 안보 파트너”라며 “방공망 구축, 드론 역량 강화와 같은 방산 분야에서 한국과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전쟁기념관은 린케비치스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이날 ‘6·25전쟁에 참전한 라트비아 용사들’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개막했다. 12월29일까지 이어질 이번 행사는 미군 소속으로 6·25에 참전한 라트비아 젊은이 14명의 사연을 소개하고 그들의 헌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목표다. 전쟁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이번 전시로 라트비아인의 숭고한 헌신이 한국과 라트비아에 널리 알려지고 기억될 것”이라며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양국 관계가 더욱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