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전 세종시 전동면 세종추모의집. 운구차 3대가 줄줄이 추모의집으로 들어왔다. 운구차엔 각각 ‘대전 낭월동’, ‘영광 진덕리’, ‘김천 송죽리’의 지명이 붙어있었다.
차가 멈추자 유족들은 가로 55㎝, 세로 25㎝ 크기의 흰 상자를 들고 내렸다. 부모의 관을 품으로 안은 듯, 비 내리는 날씨에 유족들의 발걸음은 유독 조심스러웠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인 대전 골령골에서, 전남 영광 진덕리에서, 경북 송죽리에서 추가 발굴한 희생자들의 유해를 담은 상자를 품에 안은 이들은 흰 상자가 비에 젖지 않게, 추모의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날 추모의집에선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 2학살지에서 추가로 발굴된 유해 31구와 함께 경북 김천 송죽리와 전남 영광 진덕리에서 발굴된 유해까지 모두 87구가 봉안됐다. 세종추모의집에 민간인 희생자 임시 안치식은 이번이 6차이다.
◆세종에 임시 안치된 민간인 희생자만 4000여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올해 6월부터 대전 낭월동과 경북 김천 송죽리, 전남 영광 진덕리 3곳에서 유해 발굴을 진행했다.
조사에 나선 한국선사문화연구원과 삼한문화재연구원은 지난 10월 7일부터 11월1일까지 대전 골령골 2학살지인 폭 10.8m, 높이 0.9m 규모의 도랑에서 31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총탄, 검정고무신 등 신발류, 허리띠, 단추류, 틀니 등 280점의 유류품도 찾아냈다.
골령골과 같은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인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에선 지난 7월10일부터 10월 11일까지 가로 6.5m, 세로 2.7m, 높이 0.7m 규모의 구덩이에서 42구의 유해와 202점의 유류품을 발굴했다.
전남 영광 홍농읍 진덕리에선 지난 10월1일부터 11일까지 14구의 유해와 비녀, 단추류, 동전, 이름이 새겨진 도장 등 12점의 유류품을 발굴했다. 지하구덩이(토광묘) 15기에서 찾아냈다. 이곳에선 적대세력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됐다.
현재 세종추모의집에 임시로 안치된 민간인 희생자 유해는 4000여구이다. 대전 골령골에 평화추모공원이 조성되면 골령골로 옮겨진다.
이날 안치식에서 유족들은 정부의 불통행정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김복영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장은 추도사에서 “발굴된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를 과거 충북대 박물관에 모시다가 세종추모의집으로 옮겨 올 때 유족들은 전혀 몰랐다”며 “앞으로 대전에 추모공원이 완공돼 4000여 구의 유해를 모셔갈 때는 각 지역 유족들에게 충분히 안내해 달라”고 요구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골령골…진실규명은 30% 불과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린다. 1950년 6·25전쟁 이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보도연맹원 등 정치범과 대전·충남지역 인근 민간인들이 군인과 경찰에게 끌려와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처형돼 묻힌 비극의 현장이다. 확인된 골령골 피해자 명단 500명 중 300여명이 제주4·3사건의 피해자다.
1학살지에서 8학살지까지 희생자를 묻은 구덩이는 짧으면 20∼30m, 길면 200m로 이를 연결하면 무려 1㎞에 이른다. 집단학살이 자행된 1지점 9㎡ 넓이의 땅에서만 30여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골령골의 참혹한 역사는 1999년 12월 말, 해제된 미국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유해발굴에 나서 3지점과 5지점에서 34구의 유해를 수습한 이후 2015년 민간 차원의 유해발굴에서 1지점에서 20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5년 만인 2020년부터 국가 차원의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희생자는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위의 조사가 사실이라면 골령골은 한국전쟁 최대의 민간 학살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74년이 됐지만 발굴된 유해는 1441구에 머무르고 있다.
진실 규명은 더디기만 하다.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건 현재까지 단 두명에 불과하다.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은 지난 6월 대전산내골령골학살사건 제74주기 피학살자 합동위령제에서 “골령골에서 발굴된 1441구의 유해 중 유전자(DNA) 검사로 신원이 확인된 건 단 두 명”이라면서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모든 분들이 진실규명서를 받게 하는 게 제 마지막 바람이었는데, 지난 3년간 사건 처리율은 60%에 불과하고 그 중 진실규명률은 단 30%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실은 여전히 묻혀있는데…’ 조사기간 1년도 안남아
진실화해위의 조사기간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도 유족들을 애태우고 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0년 12월 출범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임기는 2025년 5월 26일까지다. 관련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활동기한은 채 1년이 남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추가 유해발굴은 물론 현재까지 수습된 유해의 신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 등을 할 시간조차 촉박하다. 올해 11월 기준 진실화해위에 배정된 1만29건 중 조사 중인 사건은 3926건인데, 이조차 제대로 규명될 지 불투명한 실정이다.
박득배 진실화해위원회 대외협력담당관은 추도사에서 “유해 발굴과 유전자 검사 그리고 국가가 해야 되는 일에 대해 권한 범위 내에서 유족분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전 유족회장은 “진실화해위의 조사 기간은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며 “진실 규명 신청을 한 대전형무소 피학살자 유족들의 심정은 타들어가고 있다. 유족들이 진실규명서를 받을 수 있도록, 저의 바람이 내년 추모제 전에 꼭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골령골 추모평화공원 조성 하세월…유족들 ‘분통’
골령골에 조성 예정인 추모평화공원은 하세월이다.
골령골 평화공원은 2016년 박근혜 정부가 전국의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시설 조성을 위해 추진한 사업이다. 공모에서 대전 낭월동 골령골 부지가 대상지로 선정됐다. 행정안전부와 동구는 낭월동 일대 10만㎡ 규모에 추모관과 인권전시관, 상징물 등이 들어서는 평화공원인 ‘진실과 화해의 숲’ 공원을 조성키로 했으나 완공 시점은 두 차례 미뤄졌다. 당초 2020년 완공에서 2024년으로 한 번 늦춰졌으나 이마저 물건너간 상태다. 사업비가 애초 401억원에서 591억원으로 200억원 가까이 상승하자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3월 사업타당성재검토에 들어갔다.
추모평화공원이 지어지면 모든 유해를 화장 후 안장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유족들은 반발한다.
전 회장은 “유족들은 유해의 신원을 밝혀달라고 유전자 검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골의 신원이 확인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는데 정부는 여전히 발굴한 유해의 화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대전에 추모공원이 조성되면 화장 후 안장이라는 유해 안치 방식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 회장은 이어 “화장은 민간인 학살의 증거를 지우는 일이며, 신원을 확인하고자 염원하는 유족들의 희망을 꺾는 일”이라며 “모든 유해를 발굴된 상태로 추모공원에 안장해달라”고 촉구했다. 전 회장은 이 같은 내용의 서명을 지난 6월 27일 골령골 위령제 때부터 유족과 시민들로부터 받고 있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는 매년 6월 대전 동구 낭월동 13번지 산내골령골임시추모공원에서 피학살자 합동위령제를 열고 있다.